ADVERTISEMENT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49)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클레멘타인 14

나는 왼쪽 창으로 다가가 까치발을 하고 블라인드 틈으로 눈을 박아 넣다가 훕, 숨을 멈췄다. 예상대로 그곳은 목욕탕이었다. 목재로 짠 커다란 욕조와 비닐재질로 된 침대가 보였다. 벌거벗은 이사장이 침대 위에 엎드려 있었다. 처음 만날 때 보았던 그대로 단단한 근육질 몸매였다. 놀라운 것은 그러나 이사장 때문이 아니라, 이사장의 젖은 어깨를 열심히 지압하고 있는 여자 때문이었다. 미소보살이었다. 목욕을 시킨 것 같았다. 미소보살의 상의는 흥건히 젖어 있었다.

생침이 내 목구멍을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젖은 면 블라우스를 기세 좋게 밀어올린 미소보살의 거대한 젖가슴이 상체의 움직임에 따라 흐벅지게 물결쳤다. 미소보살의 이마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지압이 끝나자 이사장이 상반신을 일으키고 침대로 내려와 섰다. 반쯤 조는 듯한 눈빛이었다. 미소보살이 샤워기로 이사장의 몸을 부셔낸 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먼저 상반신을 닦았으며, 하반신과 발을 닦을 땐 무릎을 꿇은 자세였다. 이사장의 발가락을 세세히 닦아내느라 무릎 꿇은 미소보살의 얼굴 위엔 구도자의 그것에서나 볼 수 있는 경건함과 따뜻함이 한껏 배어나와 있었다.

“그만 됐네…….”
이사장이 그렇게 말한 듯했다.
말소리는 웅얼웅얼하는 울림뿐이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이번엔 목욕 후 입는 면 가운이 이사장에게 입혀졌다. 이사장은 가운을 여미고 곧 방을 나갔다. 여전히 졸린 듯한 얼굴이었다. 이번엔 미소보살이 옷을 벗었다. 땀에 젖었으니, 샤워를 할 모양이었다. 보기에 민망한데다가 이사장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 나는 은은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허리춤 높이의 창으로 몸을 틀었다. 역시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으나 전혀 틈새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틈새를 찾아 고갯짓을 하는데 안에서 키드득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처럼 음색이 맑고 장난기가 많은 웃음소리였다. 내 눈이 저절로 커졌다. 저 웃음소리는, 미소보살의 딸이자 사람들이 관음의 현현이라 여기는 애기보살 현주의 웃음소리가 아닌가.

뭐라고 웅얼거리는 울림이 느껴졌다.
이사장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또 키드득키드득, 애기보살의 웃음소리가 났다. 블라인드 커튼 틈은 안의 전경을 들여다보기엔 너무 미세했다. 나는 허리를 굽히고 기형아처럼 고개를 뉜 채 좁은 틈에 눈을 갖다 대었다. 너른 방이었다. 먼저 산수화를 그린 병풍의 아랫단이 보였고 날씬하고 하얀 종아리가 보였다. 애기보살의 종아리였다. 종아리가 곧 율동하듯이 통통 움직였다. 이사장이 ‘노래 한 곡 해봐!’라고 말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애기보살은 분명히 춤추면서 노래를 시작하고 있었다. 요즘 젊은 아이들이 부를 법한 경쾌한 리듬, 경쾌한 율동이었다. 애기보살은 지지지지, 하고 수신 상태가 좋지 않은 라디오 잡음을 흉내 내는 듯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애기보살의 상반신도 결국 시선 안에 들어왔다. 가운만 걸쳤을 이사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주 이상하고 야릇한 광경이었다.
손바닥 깊은 곳에서 꿈틀, 올라오는 말굽의 힘이 느껴졌다. 어머니인 미소보살은 반라의 몸으로 이사장을 씻기고, 그녀의 어린 딸 애기보살은 그 앞에서 역시 반라로 춤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삼라만상이 잠든 깊은 밤이 아닌가. 스탠드만 켜 놓은 은은한 조명이었다. 애기보살은 가는 어깨끈이 달린 실크슬립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다. 속살이 드러나고 몸매의 굽잇길이 모두 한눈에 들어오는 반투명 슬립이었다. 가녀리면서도 건강한 젊은 몸매였다. 밝은 빛이 살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피부는 희고 풀어놓은 긴 머리는 순수했다. 자라다 멈춘 것 같은 젖가슴은 그냥 봉긋, 솟아 있었다. 걸음걸이가 서투른 아이처럼 옆으로 게걸음을 치던 애기보살의 종아리가 리듬의 변화를 쫓아 이번엔 번갈아 앞을 향해 쪽쪽 뻗어 나왔다. 나는 보료 위에 비스듬히 앉아 조는 듯한 눈매로 애기보살을 바라보고 있을 이사장을 상상했다. 윤기 나는 애기보살의 머릿단이 종아리의 동작에 따라 스탠드 불빛을 연방 부드럽게 휘감았다. 노랫말은 창에 가로막혀 역시 웅웅웅 하고 울려나올 뿐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