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찾은 김황식 총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10년의 서울에 1970년대 뒷골목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서울시 노원구 중계본동 104번지.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다. 경사진 좁은 길의 양 옆으로는 담도 없는 슬레이트 지붕의 낡은 집들이 늘어서 있다. 창문이 길로 바로 나 있고, 깨진 시멘트 길 바닥에는 부서진 연탄재가 널려져 있다. 골목에 주민들이 함께 이용하는 플라스틱 공중화장실이 놓여있다.

김황식 국무총리가 22일 오후 이곳을 찾았다. 연말 소외된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다. 김 총리가 “의례적인 방문 일정으로 하지 말고 총리가 정말로 얘기를 들어야 할 어려운 이들을 찾으라”고 지시, 총리실에서 서울시에 문의해 ‘정말 어려운 곳’으로 독거 노인과 조손 가정이 많은 이 곳을 선택했다. 김 총리가 경로당에 들어서 “어르신들을 뵙고 얘기도 들으려 한다”고 말을 꺼내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팍팍한 현실을 앞다퉈 얘기했다.

“겨울이면 웃풍 때문에 추워서 못 살고, 눈이나 비가 오면 벽을 타고 물이 스며 내려 온다.”(유흥갑ㆍ73)

“여기서 44년을 살았는데 눈이 오면 우리같은 노인네는 걸어 다닐 수가 없다.”(이미실ㆍ73)

김 총리가 “공중목욕탕은 근처에 있는가”라고 묻자 “없어서 한참 떨어진 은행 사거리까지 걸어가야 한다”는 대답도 나왔다. 김 총리가 “집에서 목욕하는 것은 어렵죠"라고 다시 묻자 자리했던 노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화장실은 물론 씻을 공간도 제대로 갖춘 집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 총리는 “공중화장실은 제대로 치워지고 있느냐”고 물었고, 노인들은 “그건 구청에서 잘 해줘서 오물이 새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답했다.

이 곳은 재개발이 예정돼 있지만 일정이 계속 미뤄지면서 집주인들은 대부분 나가고 세입자들이 주로 남아 있다. 총리실 관계자는 “그래서 보수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리를 옮긴 김 총리가 골목길을 걷다가 열려 있는 문으로 들어간 한 집에선 혼자 사는 할머니 김병남(72)씨가 총리를 맞았다. 할머니 김씨는 “재활용 박스를 줒어 살고 있는데 다행히도 집주인이 세를 싸게 주고 있어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에 연탄 300장을 처음으로 받게 돼서 부자가 된 것 같다”고도 했다. 김 총리가 금일봉을 김 할머니의 두 손에 쥐어 주자 “천만원, 만만원으로 알고 쓰겠다”며 금세 눈물을 글썽거렸다.
김 총리는 이날 저소득층 노인들에게 획기적인 대책이나 확답은 주지 못했다. 대신 “여력이 안되는 분들은 국가에서 건강이나 생계를 챙겨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며 “아직은 나라의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여러분이 느끼기에 미흡하겠지만 어르신들에 대한 배려가 소홀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채병건 기자 mfemc@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