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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경의 장편「내 안의 깊은 계단」

중앙일보

입력

`행복의 땅에서 쫓겨나는 이브는 비통하나, 인습의 땅에서 걸어나가는 서른아홉살의 여자는 지쳐 보이지만 희망을 안고 있다' 소설가 강석경씨의 새 장편소설 「내 안의 깊은 계단」(창작과 비평사)
본문에 나오는 이 문구는 이 소설의 주제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강씨는 지난 86년 진정한 삶을 찾아 방황하는 젊은이를 그린 중편 「숲속의 방」으로 오늘의 작가상 등을 받으면서 주목을 받아온 작가.

그는 이번 소설에서 첩의 자식이라는 불행한 가족사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30 대 인물들의 고뇌와 사랑 방정식을 풀어나간다.

「내 안의 깊은 계단」은 또 일반인들이 경험할 기회가 없는 고대 유물 발굴현장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주인공 중의 한명을 고고학도로 등장시켜 발굴현장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강희와 소정은 첩의 자식이라는 멍에를 안고 태어난 인물들이다. 이들은 평범치 않은 태생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살아나가는 방법은 판이하다.

독일 유학 등을 통해 연극의 길로 빠져든 강희는 한 여자에 구속돼 평범한 결혼생활을 하는 것을 마다하고 여러 여자와 돌아가면서 동거하는 생활로 자신의 욕망과 불만을 토해낸다.

강희는 유학길에서 돌아오는 길에 육감적인 독일 여자를 동반, 어머니와 소정을 당황하게 하고 국내에서도 여러 여자와 관계를 맺는다.

이에 반해 강희의 여동생인 소정은 어떡하든 어둠의 굴레에서 벗어나 평범한 생활을 누리고자 몸부림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는 얼떨결에 평범한 남자와 결혼을 하지만 첩이라는 이유로 장모를 `당신 어머니'라고만 표현하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지루한 생활을 보낸다.

결국 소정은 중국여행 중 신라와 실크로드의 관계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일본인을 만나 순수한 사랑을 배우고는 홀로 이민을 떠나 버린다.

고고학도인 강주와 그의 약혼녀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진은 이 소설에서 행복의 상징적인 존재로 비쳐진다. 하지만 운명이라는 괴물이 이들을 덮치면서 어둠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강주가 결혼을 얼마 앞두고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이진은 강주의 사촌인 강희와 결혼, 불행이라는 가시밭 길을 걷는다. 게다가 이진은 강주의 아이까지 낳아 행복과 평범에서 불행한 인생의 길로 빠져든다.

강석경씨는 '경주에 있는 천오백년 전의 고분 곁을 지나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생사의 순환과 질서를 체득했다'며 '우리의 가슴속엔 남 모르는 깊은 계단이 있고, 삶의 껍질을 벗고 그 계단으로 내려간다면 본질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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