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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12.12 와 2.26

중앙일보

입력

우리는 12월이되면 1979년의 12.12사태를 기억한다. 중국에서도 12.12 즉 쌍12는 역사적인 날이다. 우연하게도 그날에 일어난 역사적 성격이 유사하다. 1936년 12월7일 시안 비행장에 군용기 한대가 도착했다. 장제스(蔣介石) 국민당주석이 타랍을 내린다. 두달 앞서 장제스는 “일본은 피부병이나 공산당은 심장병이다”라는 논리로 국공내전보다는 국공항일전을 주장하는 장쉐량(張學良) 동북군원수의 반발을 누르고 홍군(공산군)근거지인 옌안에 대한 총공격을 명령하였다.
8년전 일본군에 의한 부친 장쭤린(張作霖)폭사로 일본과는 불공대천의 원수가 된 장쉐량으로서는 장제스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기미를 안 장제스는 시안에 도착 공격이 제대로 되지않고 있음을 문책하고 장쉐량을 경질코저 하였다. 12.11. 밤10시 장쉐량은 서북군사령관 양후청의 지원을 받아 “敵은 화청지에!”라고 명령하여 예하 부대의 총구를 옌안에서 시안으로 돌렸다. 장쉐량은 시안을 점령하고 12.12 새벽3시 시내 중심에서 16KM 떨어진 唐 현종과 양귀비의 별궁 화청지의 장제스별장을 공격하였다. 총소리에 놀란 장제스는 안경과 의치까지 그대로 두고 추운 겨울새벽에 잠옷바람으로 뒷산으로 몸을 피했다.
12월 새벽의 추위는 장제스를 산속에 오래 두지 못했다. 산을 내려온 장제스는 장쉐량에 의해 구금된다. 그후 국공합작에 의한 항일전선을 약속한 장제스는 풀려 나 난징으로 돌아간다. 12.25 크리스마스였다.
국공합작 항일전선을 만들어 준 것은 장쉐량의 거사만이 아니었다. 시안사변으로부터10개월 전 1936년 2.26 일본의 수도 한복판에서 “尊皇討奸‘이라는 슬로간을 내건 젊은 장교의 무리들이 昭和유신을 주장하면서 총리대신등 원로들 저택을 습격 살해하는 군사반란이 일어켰다. 이들을 황도파라고 불렀다. 통제파가 국방확대를 주장하면서 만주국을 지키기 위해 북차이나 공격을 주장(侵華論)하는 데 반해 황도파는 중국침략보다는 내치를 중시하고 반쏘 반공을 주장하였다. 황도파 군인들의 섣부른 거사는 결국 몇사람의 생명을 빼앗았지만 결국 실패하여 오히려 통제파에 의해 황도파의 고위 장성들이 숙청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이른바 2.26사태로 도조히데끼.이시하라간지등 통제파는 장애물 없이 중국침략을 본격화 할 수있었다. 2.26 이후 일본 정계를 주도하게 된 통제파의 본격적인 중국침략에 불안을 느낀 중국의 지도자들은 장제스의 고집을 꺾고 항일을 위한 국공합작을 끌어 낸 것이다. 1937년 7.7 통제파가 중심이 된 루거우차오에서 중일전쟁 발발은 일본의 2.26과 중국의 12.12가 부딪칠 수밖에 없는 필연의 결과였다.

유주열 전 베이징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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