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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아니 저거 …’ 하시는 분, 고민 덜어드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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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일본 도쿄 시나가와 역에 설치된 ‘대리선택 자판기’. 고객이 없을 때는 상품 광고판이지만 고객이 접근하니 상품 영상이 뜨고 터치패널로 상품을 선택하게끔 돼 있다. 이어 자판기 윗부분에 달려있는 센서가 고객의 성별·나이 등을 탐색해 그에 맞는 추천 음료수를 표시한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현대인은 어지럽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첨단 제품과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무장한 신상품들. 뭐를 고를지 골치가 아프다. 아니 선택을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스트레스고 머리가 띵할 지경이다. 이럴 때 드는 생각, “누가 대신 좋은 선택을 해주면 안 될까.” 사업가들은 이런 수요를 놓치지 않는다. 이와 관련된 기발한 제품과 서비스가 일본·미국 등지에서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른바 ‘대리선택의 시대’다.

대리선택 자동판매기

도쿄 시부야의 ‘랭킹 랭퀸’이란 점포에 진열된 상품들. 화장품·건강식품 등 300가지 품목 중 판매순위 1~5위 인기 상품만 진열한다. ‘남들이 많이 사는 상품’을 보여줘 바쁜 고객들의 쇼핑시간을 절약해주는 상술이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9일 낮 도쿄 시나가와(品川)의 JR(Japan Railways: 일본에서 가장 큰 철도) 역. 개찰구를 통해 50m 가량 들어가니 네모난 광고 간판 같은 것이 나타났다. 상품광고 화면들이 속속 바뀌는, 지하철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고 모니터다. 그런데 그 화면에 가까이 다가가니까 다양한 음료수가 진열된 화면으로 바뀌었다. 음료 자동판매기다.

 손님이 없을 때는 광고 모니터로, 손님이 오면 자동판매기로 변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일반적인 자동판매기와 달리 상품 샘플이 없다. 대신 터치패널이다. 더욱 기발한 건 여기서부터다. 기자가 얼굴을 자동판매기 쪽으로 돌리자 윗부분에 달려 있는 카메라 센서가 기자의 얼굴을 자동 분석해 특정 음료를 표시해 주는 것 아닌가. 모니터에 있는 음료 중에 추천된 음료 밑에는 ‘오스스메(추천)’란 빨간 표시가 붙었다. “뭘 마실까?” 하며 이것저것 고민하기 싫은 고객 입장에선 자동판매기가 추천한 음료를 선택하면 ‘왠지 입맛에 맞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물론 원하는 음료를 손수 선택할 수도 있다.

 이 자동판매기의 ‘대리선택’ 기능은 고객의 성별·나이, 그리고 계절·시간대·기온 등의 복합적인 정보를 참고한다. 예컨대 겨울철에 특히 고령자에게는 차가운 탄산음료보다 따뜻한 녹차를 추천하는 식이다. 축적된 판매정보도 반영된다. 성별과 연령을 제대로 판정할 확률은 75% 수준이라 한다. 물론 ‘추천 음료수’로 자주 뜨게 해달라는 음료수 업체의 로비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런 데에 휘말리면 답이 없다. 고객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선택을 도와주는 이 친절한 자동판매기는 8월 일본에 처음 등장했다. 향후 2년 안에 도쿄 인근을 중심으로 500대가 보급될 계획이다. 고객이 없을 때의 상품 광고모니터 기능이 있어 짭짤한 수입도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벌써부터 물건이 모자랄 정도로 주문이 쇄도한다고 한다.

 이와는 별개로 ‘그냥 아무것이나 마시기만 하면 된다’는 고객을 위해 ‘랜덤(random)’ 표시를 누르면 무작위로 음료가 나오는 ‘랜덤 자동판매기’도 일본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남들의 선택에 따른다

일본에서는 백화점이나 상점에서 정초마다 봉투를 밀봉한 ‘복주머니’를 판다. 예기치 않은 즐거움과 놀라움을 추구하는 고객들이 몰려 성황을 이룬다. [지지통신 제공]

10~20대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시부야(澁谷)역 구내. 개찰구를 나오자 10~30대 여성들로 북적이는 가게가 보였다. 이름 ‘랭킹 랭퀸(ranKing ranQueen)’이 심상찮다. 가게 이름대로 이곳은 CD·서적·화장품·다이어트 식음료·일용품 등 약 300가지 품목의 랭킹 1~5위 물건만 모아놓고 판다. 순위는 3~4주에 한번씩 인근의 대형 일용품 백화점 ‘도큐핸즈’와 도매상 등의 판매실적을 토대로 엄정하게 매긴다. 판매순위가 바뀌면 상품이 즉시 교체된다. 점포 안에는 늘 유행을 선도하는 상품들로 가득 찬다. 이용객의 80~90%가 10~30대 젊은 여성이라고 한다.

 물건만 잔뜩 진열해놔 봐야 바쁜 비즈니스맨들에겐 버거울 뿐이다. 이들은 물건을 찬찬히 고를 시간이 넉넉지 않고, 일일이 따지고 사는 것도 피곤하다. 이런 발상이 이런 업태를 만들어냈다. ‘가장 잘 팔리는 물건이니 안심하고 사 가시라’고 웅변하는 듯한 마케팅 기법이다. 이른바 ‘선택의 효율’이다. 시부야 1호점을 시작으로 일본 전국에 7개 점포가 성업 중이다. 점포당 평균 내방객은 하루 4000명이다.

 예기치 않은 즐거움

미국에서는 랜덤쇼핑몰 ‘섬싱스토어(http://www.somethingstore.com)’라는 것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10달러에 한 상품을 배달해주는데 내용물은 알 수가 없다. 예기치 않은 즐거움과 놀라움을 준다는 것이 세일즈 포인트다. 어찌 보면 일본의 정월 관행인 ‘복주머니’에서 유래됐는지 모른다. 일본에서는 백화점이나 상점이 1월 1일이나 2일의 첫 영업 개시를 기념해 여러 가지 물건을 한 봉투에 넣어 밀봉한 뒤 ‘복주머니(福袋)’란 이름을 붙여 고객들에게 판다. ‘1만엔 복주머니’ ‘3만엔 복주머니’ 등이 보통이다. 뜯어보면 실제 값어치가 구입가의 두 배가량 된다. 하지만 철 지난 물건이 섞여 있다. 구매자는 상품을 선택하는 대신, 복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상품을 보면서 느끼는 예기치 않은 즐거움과 놀라움을 선택하는 셈이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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