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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를 바라보는 어머니 마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96호 31면

뭍사람들에게 섬은 언제나 애처로워 보인다. 마치 멀리 떠나보낸 자식들을 한순간도 마음에서 떨치지 못하듯, 수백 리 뱃길을 달려야 겨우 어렴풋한 형상으로 다가오는 그 섬들은 세상의 어미들에게는 언제나 아쉬움이자 아픔이다. 어미를 못 잊어서인가, 섬나라 신화에는 항상 여신이 등장한다. 어미의 손길이 그립기 때문이다. 한반도 신화의 주인공은 남성인 단군인데, 일본의 신은 여신 아마테라스다. 태양신인데도 굳이 여신인 까닭은 바다 위에 떠 있는 고립무원의 삶을 위로받고 싶었던 까닭이다.

연평도는 그렇게 자식처럼 떠 있었을 것이다. 한반도가 품은 수천 개의 섬들 중에 가장 위험한 곳에 떠 있었기에 안쓰러움이 더했을 터에, 느닷없이 가해진 북한의 포격은 뭍사람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적어도 한반도 어미들의 마음은 그랬다.

며칠 전 자선단체 모임의 뒤풀이에서 있었던 일이다. 역시 분위기가 침통했다. 그 단체는 1990년대 말 북한의 기근과 ‘꽃제비’에 관한 보도를 접한 몇몇 친구들이 북한 어린이들을 돕고 통일 미래를 준비하자는 취지에서 만든 봉사단체다. 회원 대부분이 아이를 가진 전업주부들로 앞으로 통일시대를 살아 갈 아이들의 미래를 준비한다는 소박한 취지에서 시작했다. 그렇게 10여 년이 흐르자 꽃제비 또래였던 아들들도 징집연령에 도달했고 더러는 이미 군인의 어머니가 돼 있었다. 연평도의 피격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쏟아진 포격처럼 느껴질 만도 했다.

화제는 자연스레 서해안 초소를 지키고 있는 아들 같은 군인들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우리, 가서 장병들 밥이라도 퍼 주면 좋겠어. 주민들이 못살겠다고 나오는 연평도, 우리 같이 들어가서 뭔가 도울 일을 찾아보자. 나라를 지키는 데 아들을 보낸 어미가 못할 일이 뭐가 있겠어?” 최전방에서 철책근무를 하고 있는 아들을 둔 한 멤버가 제안했다. 모두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 동석한 다른 멤버의 남편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가 반대하는 이유를 들어보니, 간다고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 괜히 방해만 하는 거 아닌가, 사회 일각에서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볼 수 있다, 민감한 이슈에 나서지 말라 등등이었다. 그 말을 듣는 우리는 참 의아했다. 내 자식, 내 가족, 그리고 내 생명이 아닌가, 우리가 지키려 하는 것이? 그게 어째서 민감하고 복잡한 것일까?

지금, 한반도 어미들의 가슴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전쟁을 겪었던 노세대에게는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아들과 남편을 잃은 악몽이 다시금 살아나고, 흩어진 가족과 생이별한 친지의 기억, 그리고 파괴된 마을을 등져야 했던 순간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군대에 아들을 보낸 이 시대의 어미들은 포화 속에 던져진 자식들을 두고 애태워야 했다. 전쟁만큼 모심(母心)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이 없다. 모심은 회복·자유·생명 같은 평화의 정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평도 피격을 두고 서로 다투는 대응논리들이 낯설다. 지식인·언론·정치인·사회단체들의 논리와 주장이 엇갈리고, 보복 공격에서 확전 공포로 논점이 벌어지는 가운데 국제정치가 가세해 마치 잘못된 반죽처럼 울퉁불퉁 엉겨 붙어 있다. 애타는 어미의 마음은 그것이 아니다. 어쨌든 살상은 안 된다는 것, 폭력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강화하고 전략적 우위를 점하려는 모든 논리에 생명 우선의 사상을 불어넣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생명을 향한 어미들의 지혜가 필요한 때인지 모른다. 삐뚤어진 자식을 매로 다스리기보다는 “얘야, 그건 사람 사는 길이 아니란다”라고 타일러 줄 수 있는 마음, 북한 주민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수 있는 마음, 때론 엄격하게 때로는 자애롭게, 그러나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어미의 마음이 필요한 게 아닐지 싶다. 만나기만 하면 서로 싸우는 자식들도 어미의 넉넉한 품에 조용히 깃들 수 있다. 남북한 모두를 내 자식으로 끌어 안는 큰어미의 마음은 전쟁을 원치 않는다. 결핍의 고통을 치유하고 싶고, 배고픈 아이들을 먹이고 싶을 뿐이다.

북한 지도부가 모심을 회복하는 일, 그게 가능할까? 외로운 자식처럼 떨어져 앉은 섬들을 전략적 존재로만 생각하는 북한의 폭력적 호전성을 치유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가공된 이념적 원한을 공격적 가해의식으로 뒤바꾼 저 정권은 얼마나 더 세기적 부랑아로 떠돌아야 하는가? 잘못된 자식을 바라보듯 한반도의 모심은 시꺼멓게 타 들어간다. 새해엔 집 나간 아이가 뉘우치고 돌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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