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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기획]“당신의 아내도 아줌마다” …아줌마가 쓰는 신아줌마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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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줌마는 인기있는 단어다. TV에서도 PC통신에서도 아줌마 논쟁이 시시때때로 벌어진다. 뉴스를 만들어내는 사건 속에서도 결혼한 여성이 있으면 너나없이 ‘아줌마론’으로 발전한다. ‘고급옷 로비사건’이나 손숙 前 환경부장관 퇴진 문제가 불거져도 ‘역시 아줌마가 문제’라는 반응이 즉각 튀어나온다. 금강산 관광에 나섰다가 북측에 억류된 민영미씨는 ‘함부로 조댕이 놀리는 아줌마’‘정신나간 아줌마’로 매도된다. 왜 무슨 문제만 생기면 늘 아줌마가 문제로 부각되는 것일까? ‘20세기 한국 사회의 마지막 천민’으로까지 아줌마는 비하되고 있다. 아줌마 작가의 눈을 통해 우리 사회 아줌마 비하의 배경을 깊숙이 들여다봤다.[편집자]

지난 3월, 서울 종로구 소격동 선재아트센터에서는 색다른 전시회가 열렸다. 전시회 이름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오형근의 ‘아줌마전(展)
’으로 “진주목걸이를 한 돼지 아줌마”“쌈 잘하게 생긴 아줌마” “압구정동 스타일의 아줌마” “가정불화가 엿보이는 아줌마” 등의 흥미있는 제목을 단 사진들이 내걸렸다. 거리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중년여성의 모습을 담은 이 전시회는 예술의 소재로는 이색적인 ‘아줌마’ 덕분에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한달 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4월, MBC에서는 ‘아줌마, 서글픈 자화상’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지하철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몸을 날리고, 우르르 온천욕을 떠나고, 시도 때도 없이 수다를 떨고, 가족들을 위해 시장통을 돌아다니며 수제비를 팔고, 슈퍼마켓에서 좀더 싼 물건을 차지하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는 모습을 통해 아줌마들의 주책·무례·웃음·눈물을 보여주었다. 중간중간 ‘아줌마는 20세기 한국사회의 마지막 천민이다’‘아줌마 때문에 울 나라 망한다’‘아줌마, 한마디로 한심한 인간집단’과 같은 신세대들의 아줌마 인식까지 곁들였다.

그러나 “아줌마의 실체를 조명함으로써 흔히 뻔뻔함과 무례함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아줌마세대와 비(非)
아줌마세대간의 화해를 모색해 보고 싶었다”는 제작진의 기획 의도는 진짜 아줌마들의 거센 항의에 무색해져 버렸다.

“이곳저곳에서 아줌마의 자화상이라고 들춰내는 것이 20∼30년 전 아줌마의 모습이다. 요즘 30대, 40대 여성 가운데 솔직히 몇명이나 그런 난리를 치고, 다리를 벌리고 앉는가.”

“아줌마라고 보여준 모습이 40대 후반에서부터 50대거나, 연령층으로 보면 할머니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 분들은 먹고살기 어렵던 시절 전쟁과 가난을 겪었고,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사회적인 교양이나 체면 등은 잊어버리고 살아야 했던 분들, 바로 이 땅의 어머니들이다. 이 땅의 어머니를 비하(卑下)
하고, 우리 사회가 아줌마라고 하면 떠올리는 통념을 더욱 고착시킨 방송국의 돼먹지 않은 수작 아닌가 싶다.”

“아줌마라고 불리는 것이 좋았는데, 그 프로그램을 보고 나니 씁쓸하다. 아줌마가 아닌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줌마가 어떤 존재인지 새삼스레 듣고보니 진짜 슬퍼졌다. 아줌마의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 프로그램이었다.”

결국 이 프로그램은 사회와 아줌마의 화해는커녕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아줌마가 되어버린(결혼한 여성은 일단 아줌마로 불리므로)
아줌마들을 더욱 서글프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아줌마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아줌마 자신의 목소리와 시각은 빠진 채 타 집단에 의해 해석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시도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해프닝이 되어버렸다.

“대한민국 아줌마들, 오늘 밥하지 맙시다”

비슷한 시기에 ‘아줌마의 해방구’로 일컬어지는 가수 양희은의 콘서트가 열렸다. 저녁 시간에 집을 비우기 어려운 아줌마들을 위해 별도의 낮 공연을 마련하고 주부에게는 20%를 할인해 준 이 콘서트의 홍보 카피는 이랬다.

‘아줌마들이 왁자지껄, 여의도가 들썩들썩, 대한민국 아줌마들, 오늘은 밥하지 맙시다!’

이 뿐만이 아니다. 하여튼 요즘 아줌마가 인기다. PC통신에서도 아줌마는 가장 인기 있는 소재다. ‘아줌마들이란…. 쯧쯧’ 투로 시작되는 비(非)
아줌마 집단의 아줌마 할퀴기가 등장하면 곧 이어 ‘아줌마라고 다 그런가’‘그러는 당신도 아줌마의 자식’ 이라는 아줌마들의 반박으로 이어지는 아줌마 논쟁이 여기저기서 벌어진다. 이같은 논쟁은 지난 97년 YWCA 산하의 한 모임이 ‘테트리스’를 음란성 오락물로 규정한 것이 단초가 되어 시작되었고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PC통신을 뜨겁게 달구는 소재가 되었다.

뉴스를 만들어내는 사건 속에서도 결혼한 여성이 있으면 너나없이 ‘아줌마’론으로 이어졌다. ‘고급옷 로비사건’이 터졌을 때는 ‘장관 부인도 아줌마다’‘아줌마는 무슨, 여편네라고 불러라’로 이어졌고, 손숙 전 환경부 장관의 임명과 퇴진을 두고는 ‘장관 아줌마’ 논쟁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금강산 관광에 나섰다가 북측에 억류된 민영미씨는 ‘함부로 조댕이 놀리는 아줌마’‘정신나간 아줌마’가 되는 등 무슨 문제만 생기면 늘 아줌마가 문제로 부각된다. 이유야 어떻든 요즘 아줌마는 확실히 한창 뜨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아줌마라는 단어가 들어있으면 조회 횟수는 껑충 올라간다. ‘넷츠고 플라자’에 올라온 ‘아줌마가 보는 신세대’는 게시 5일만에 3천회에 가까운 조회를 기록했다. 아줌마라는 단어가 풍기는 뉘앙스가 다른 사람의 호기심을 일단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내용을 읽어보면 아줌마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도 제목에 아줌마를 양념처럼 끼워넣은 게시물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일단 제목을 본 다음 ‘읽기’ 항목을 클릭해야만 조회 횟수가 올라가는 것을 의식한 것이리라.

또한 아줌마는 유머의 소재로도 꽤 인기가 있다. ‘참새 시리즈’ ‘최불암 시리즈’ ‘만득이 시리즈’ ‘사오정 시리즈’의 뒤를 이어 ‘아줌마 시리즈’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내친 김에 유머에 등장하는 아줌마의 모습도 살펴보자.

초보운전 아줌마 ─ 아줌마가 ‘초보운전’이라는 표어를 달고 차를 몰았다. 그러자 남자들이 “밥이나 할 것이지 어딜 기어 나와”라고 소리질러댔다. 그러나 다음날도 아줌마는 과감하게 차를 몰았다. 차 뒤에는 이런 말이 붙어 있었다. “나, 지금 밥하러 간다.”

언제, 어디든 ‘몸뻬’바지 하나로 출동한다. 뽀글뽀글 파마로 1년 이상 거뜬하다. 급할 때는 청소부로 변신해 남자화장실을 쓸 수 있다. 버리기 아깝다며 남보다 많이 먹을 수 있다. 촌스러운 이름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누구 엄마, 무슨 댁, 몇 호로 불리니까….(아줌마가 처녀보다 좋은 다섯 가지 이유)

돈도 없으면서 쇼핑을 너무 좋아하는 아줌마가 있었다. 밥만 먹으면 백화점에 가는 아줌마가 큰 결심을 하고 백화점 문화센터 서예반에 등록했다. 몇개월 뒤 한자성어를 멋지게 써서 거실 벽에 걸어두고 남편에게 자랑을 했다. 그가 써놓은 한자성어는 ‘월현목신’(月現木新)
. 남편이 그 뜻을 묻자 아줌마 왈 “월요일은 현대백화점이 놀고, 목요일은 신세계백화점이 논다는 뜻이지.”(백화점 아줌마)

사은품 받을 때 한 개 더 달라고 애걸하거나 받고서도 줄 맨 뒤로 가서 안 받은 척하고 또 달라고 하는 사람. 음식점에서 계산하면서 입가심 사탕 한 주먹 쥐어 핸드백에 넣으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 사람. 괜히 남들 얘기부터 드라마 내용까지 죄다 좔좔 수다를 늘어놓느라 전화 통화가 길어지는 사람. 버스 좌석에 앉을 때 들고 있던 물건을 선반에 올려놓지 않고 다리 사이에 내려놓는 사람. 과일 살 때 이 과일, 저 과일 한개씩 다 까먹어 보고 난 다음에야 “요거, 천원어치만 주세요” 하는 사람. 목욕탕에서 먼저 있던 사람이 물건 챙겨 나가기도 전에 시치미 뚝 떼고 엉덩이나 어깨를 들이밀며 “애, 이리 와. 여기 자리 났다”고 하는 사람. 백화점에서 물건은 사지 않고 시식코너만 돌아다니며 한 끼니를 해결하는 사람. 세일 때 큰 마음 먹고 코트를 한 벌 사더라도 디자인이나 색깔과는 상관없이 따뜻한가만 따지는 사람.(아줌마가 뭐냐 하면)

‘아줌마=교양없는 여자’인가

목욕탕에서 수건을 몸에 두르면 아가씨, 머리에 두르면 아줌마. 파마할 때 예쁘게 해달라고 하면 아가씨, 오래 가게 해달라면 아줌마. 의자에 앉을 때 다리를 꼬고 앉으면 아가씨, 한쪽 다리를 접어 의자 위에 올리고 앉으면 아줌마. 모임에서 서로 ‘언니, 언니’하면 아가씨, ‘형님,형님’하면 아줌마. 버스에서 주위를 살피고 앉으면 아가씨, 앉고 나서 주위를 살피면 아줌마. 아가씨라고 불러 좋아하면 아줌마, 싫어하면 아가씨. 운전할 때 선글라스 끼면 아가씨, 흰 장갑에 챙모자 쓰면 아줌마. 하이힐 신고도 뛸 수 있으면 아가씨, 운동화 신고도 못 뛰면 아줌마.(아줌마와 아가씨의 차이)

이래저래 아줌마는 요즘 우리 사회에서 끝없이 흥미를 끄는 인기 있는 소재이고, 논란의 대상이 되어 있다.
아줌마의 범주를 결혼한 여성이라고 했을 때 현재 우리 나라에는 전체 인구의 20.4%에 해당하는 9백56만명(99년 추계)
의 아줌마가 존재한다. 전체 여성의 41.6%에 해당하고 1천만명에 육박하는 아줌마. 인구 구성비로 보나 단순한 수치로 보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아줌마를 이렇게 결론내린다. “일없이 놀고먹으며, 모든 것을 본능에 맡기며 살고, 모이면 계를 조직해 쇼핑이다 관광이다 우르르 몰려다니고, 몸매나 옷차림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아 푹 퍼졌으며, 민주시민으로서 지켜야 할 예의나 공중도덕에 가장 관심을 덜 갖고, 쉽게 자신을 포기하고, 관심이라고는 오직 자식과 남편밖에 없고, 무식하고, 목소리가 크고, 별 것 아닌 얘기로 1시간 이상 수다를 떨 수 있는 사람’. 간결하게 말하면 ‘아줌마=교양 없는 여자’가 되어버린다.

아줌마가 아닌 다른 범주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줌마는 단지 ‘아가씨가 아닌, 또는 아저씨가 아닌 사람’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아가씨·아저씨에 대비되는 단어가 아니다. 보다 열등한 범주의 집단처럼 보인다. 남성보다 열등한 성(性)
으로서 여성, 젊음에 비해 열등한 가치로서 늙음, 바깥 활동에 비해 열등한 가치로서 가사노동 등…. 따라서 아줌마가 비하되는 일차적인 원인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가부장적이고 남녀차별적인 가치체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보자. 지하철에서 자리를 차지하려고 난리를 치는 아줌마는 ‘아줌마’라는 이름으로 문제가 되지만, 벌겋게 술에 취해 여성들 뒤에서 치근덕거리는 아저씨는 ‘아저씨’라는 이름으로 매도되지는 않는다. 체면을 차리지 않는다고 “아줌마들은 체면이라고는 없다”고 하지만 사회적인 직업을 가진 비율이 훨씬 높은, 사회적 체면이 높은 아저씨들이 밀폐된 공간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추해지는 것 또한 ‘아저씨’라는 이름으로 싸잡아 논란거리가 되지 않는다. 경로석에 앉아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아가씨들조차 ‘아가씨’로 통칭되어 도마 위에 오르는 경우는 별로 없다.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고, 자기의 이익만 추구하느라 타인에게 가해지는 위해(危害)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염치나 체면을 모르는 개인은 비단 아줌마 계층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계층에나 있다. 비록 아줌마들이 좀더 많이 눈에 띈다 하더라도….

그러면 왜 아줌마는 오직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떠오를까. 왜 아줌마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긍정적인 이미지를 깡그리 덮어버리게 되는 것일까. 그 이유를 한번 알아볼 필요는 없는 것일까.

왜 아줌마만 문제일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는 관대하다.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에는 어느 정도 관용을 보인다. 같은 아줌마라 하더라도 내 아내, 내 어머니를 향해 “아줌마들이란…” 투로 말하지는 않는다. 비록 내 아내 혹은 어머니가 흔히 말하는 아줌마적 속성을 자주 내비친다 하더라도 애정이 있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밉다니까 업어달라고 한다’는 속담이 있듯, 싫어하는 대상에게는 누구나 인색해지는 때문일까.

아줌마는 우리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단어는 아니다. 지난 해 5월, 프랑스 정부 관광청이 만든 ‘한국 관광시장 연구보고서’에는 신종 마케팅 용어로 ‘아줌마’(adjumma)
가 등재(登載)
되었다. 그 정의는 ‘40대 이상 집에 있는 여자들. 자녀들을 다 키운 뒤 시간과 경제적 여유를 누리는 한국 여성’이다.

다른 친구 아줌마들과 계를 조직해 해외여행을 즐기고, 왕성한 구매력으로 쇼핑을 하는 집단이어서 IMF 쇼크 이전에는 이 아줌마들이 한국시장에서 집중적인 공략 대상이었다. 한국 특유의 구매집단을 찾다보니 아줌마와 미시족이라는 정체불명의 집단이 튀어나왔고, 알맞은 단어를 찾지 못해 발음 그대로 아줌마라는 이름을 사용해 그 집단을 정의했다는 설명이다. 40대 이상으로 그 연령이 제한된 것이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아줌마와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사실 우리 나라에서 통용되는 아줌마는 일단 ‘결혼한 여성’이면 필요 조건과 충분 조건을 모두 갖춘다.

“온종일 시끄러운 아기와 함께 있고, 허리가 휘도록 집안 곳곳을 치워야 하는데도 나는 참 심심하다. 태어나서 이처럼 청소를 해보기도 처음이다. 소시적에 이렇게 청소를 자주 했다면 우리 엄마, 아빠는 행복해서 날아다녔을지도 모른다. 어쩌다 실업자가 돼버린 나는 집안에서 답답함과 미안함과 외로움과 심심함에 미치기 직전이다. 내가 한때 백수 처녀의 지위를 감당하지 못하고 힘들어 할 때는 ‘너처럼 활기찬 아이는 일을 해야 해’라고 말해 주더니, 이제는 ‘집안엔 네가 있어야지’라고 말한다. 주위에서는 이제 나를 ‘황숙영’이라는 사람이 아닌 ‘아줌마’라는 정물로 인식한다. 내게도 사춘기 한 중간을 지나는 막내 동생 못지 않은 감수성이 있을 수 있고, 나도 가끔은 외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기 시작한다. 내가 자기 컴퓨터를 손봐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은 아줌마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라워 한다.

아줌마가 되기 전에 입었던 롱코트를 지금 입으면 모두들 놀라워한다. ‘오, 아줌마 바람났군.’ 농담인 줄 알지만 한대 때려주고 싶다. 단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내가 면티에 쫄바지만 입고 슬리퍼만 신을 거라고, 이젠 내가 담배 피울 수 있는 능력이 사라졌을 거라고 믿는 것 같다. 아주 굳게…. 나는 내 아들이 여자는 담배 피울 수 없다는 금기를 안고 자라기를 바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모두들 내가 결혼과 함께 아주 보수적인 사람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남편과 동년배라 하더라도 존대하기를 바라고, 남편의 친구들 앞에서 다소곳이 웃고 있기를 바라고, 예전에 죽도록 가던 노래방을 어쩌다 한번만 가도 ‘이 아줌마, 노래 연습만 하고 다닌 거야?’라는 싸가지 없는 멘트가 쏟아진다. 결혼하고 2년이 지난다. 나는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적응하지 못한 일들을 내 주변사람들은 나보다 더 빨리 적응해버렸다”.(witch71)

한 PC통신의 주부방에서 퍼온 글이다. 결혼한 지 2년밖에 안된 젊은 아줌마의 글이지만, 그의 고백은 우리 사회에서 아줌마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아줌마가 컴퓨터를 한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고, 아줌마가 옷을 차려입는 것도 예삿일은 아니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과하면, 즉 아줌마가 되면 모든 사회적인 활동이나 관심과는 무관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가정과 사회의 경계가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달리 주부 이외의 공식적인 직업을 가지지 않으면 사회적인 존재로 인정받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봉사활동, 종교활동, 학부모활동을 통해 그 나름대로 가정 밖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 여성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정신없이 바쁜 육아에서 어느 정도 해방된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이 과정에서 대다수 전업주부들은 가정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일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도 이 땅의 여성들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육아의 1차적인 책임은 부모, 특히 어머니에게 있다는 것은 굳이 강요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수용한다.

이 때문에 많은 직장여성들은 ‘아이냐, 일이냐’를 놓고 갈등에 빠진다. 부와 모가 육아의 책임을 함께 지고 있다지만 육아문제로 ‘일이냐, 아이냐’를 고민하는 아버지는 아마 없을 것이다. 때문에 여성이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생활을 계속하려면 믿을 만한 탁아기관을 찾아내야 한다.

당당한 직업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주부’

그러나 현실적으로 젖먹이 어린이 때부터 맡길 만한 탁아기관은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친정 어머니든 시어머니든 형제든 또 다른 한 여성의 희생을 담보로 하지 않으면 필생의 업으로 여겼던 직장도 그만둘 수밖에 없다. 직장을 그만둔 것이 주체적인 결정이 아니라 상황에 몰린 나머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되는 경우 직장생활에 대한 아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은 다른 어떤 일보다 가치 있고 훌륭하다. 가정에 주부가 없다면 남성이 바깥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 한 사회의 가장 근본이 되는 사회, 가족사회를 지키고 이끄는 사람이 주부다.’

이렇게 주부의 역할은 높이 평가되지만 가사노동이나 육아는 공식적인 사회활동으로 간주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가사노동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 치부되고 경제활동, 정치활동, 군사활동 등 주로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것만이 사회활동이다. 이 때문에 가사노동을 하며 집에만 있는 아줌마들은 사회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 된다. 또 돈을 벌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비하는 사람, 노는 사람이 된다.

‘할 일이 없으니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수다나 떠는 아줌마들’이라고 비난하는 데는 ‘경제적으로 무능한’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런 사회적 통념에 짓눌려 있기 때문에 아이를 키우며 기껏 한 시간도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을 만큼 바쁘게 일하면서도 무슨 일을 하느냐고 하면 주부 스스로 ‘논다’고 표현하게 만든다. 주부라는 직업이 사회적, 공식적 직업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일을 직업으로 당당하게 내세우지 못하는 것이다. 주부가 주부로서 자긍심을 가지지 못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려고 하면 “아줌마가 뭘 안다고 나서?”“살림이나 잘해!”가 돌아오는 대답이다. 그러다보니 주부의 자아실현은 곧 일을 갖는 것이고, 가정을 유지하면서 직업을 갖는 것을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꼽게 된다. 주부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알뜰살뜰 주부 역할에 재미를 느끼다가도 “아줌마 주제에…” 소리나 듣는 처지가 된다면 자긍심은 고사하고 자신의 존재마저 하찮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줌마들은 왜 주부라는 자신의 직업에서 자긍심을 찾지 못하고 바깥으로 나오려고만 하는지, 어머니의 역할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기까지 하면서…. 이해할 수 없다”면 가사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고 “아줌마가 무슨…” 이라는 식의 고정관념을 버리는 데 아줌마 자신은 물론 아저씨를 포함한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힘을 합쳐야 한다. 어디 아줌마 뿐일까. “공부도 못하는 주제에…” “엽전들이란…” “늙으면 죽어야지….” 젊고 잘난 남자가 아니면 싸잡아 비하하는 우리 사회 풍토 속에서 초라해지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친구가 있는데 걸핏하면 아줌마가 뭐 그리 바쁘냐고 해요.‘노는 주제에…’라는 말은 쏙 뺐지만 결국 노는 사람이 뭐 그리 바쁘냐는 거죠. 그럴 때면 ‘아줌마가 노니? 얼마나 바쁜지 알아? 너도 결혼해 봐’라고 대꾸하면서도 기분은 별로 안 좋더라구요.”

올해로 마흔 고개를 넘긴 이웃 아줌마의 말처럼 아줌마는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해야 한다. 자녀 양육과 교육, 하루라도 거를 수 없는 집안 일, 친척간의 화목 도모, 재산 늘리기 등이 큰 덩어리로 묶었을 때 아줌마의 몫이 되는 일들이다. 가장 일찍 일어나 가장 늦게 잠자리에 드는 아줌마의 하루는 그저 그런 일상적인 일로 시작하고 끝나는 듯이 보이지만, 그 일은 엄청나게 고된 육체노동이다.

어쩌다 한번 베란다 청소를 하면서 대단한 생색을 내는 아저씨나, 제 때에 실내화를 빨아두지 않았다고 짜증을 부리는 자녀가 단 하루만이라도 아줌마로 살아본다면 아줌마의 하루는 벅찬 육체노동의 연속이며 끝도 없이 신경을 분산해야 ‘표나지 않게’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아줌마들은 그 벅찬 일을 전문가답게 능수능란하게 해치운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납기일이 각각 다른 공과금도 기한 넘기지 않고 잘 챙겨서 내야 하고, 아이의 안전한 등교를 위해 녹색어머니회 당번도 해야 하고, 배식 당번을 하기 위해 한 달에 한두번은 학교에도 가야 한다. 모든 관공서에는 업무시간이 정해져 있으므로 직장에 있는 남편 대신 인감증명서나 주민등록등본도 떼어 와야 한다. 아이가 반장이라도 맡으면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뒤치닥거리를 해야 하고, ‘아버지는 나귀 타고 장에 가시고’하던 시절이 아니니 장보기도 아줌마의 몫이다. 바쁜 남편 대신 친정, 시댁을 막론하고 경조사도 빠짐없이 챙겨야 한다. 아줌마가 되면 할 일도 많고 가야 할 곳도 많아진다.

똑같은 주부라 하더라도 그 역할은 가족관계나 처한 입장에 따라 각기 다르고, 해야 할 일도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한다. 취업주부나 아저씨들에 비해 엄청나게 시간이 많을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공식적인 직업을 가진 취업주부들은 전업주부들이 피할 수 없는 책임으로 떠안는 역할들(늘 반짝반짝 빛나는 집안과 깨끗하게 다림질된 셔츠에 대한 기대, 인스턴트 식품에 대한 가족들의 거부, 제사상 차리기, 남편의 퇴근이나 아이들의 하교시간에는 반드시 집을 지키고 있기 등)
을 암묵적으로 면제받으므로 자신의 입장에 견주어 전업주부들이 그만큼 한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 오해이기 쉽다.

많은 사람들은 아줌마라고 하면 ‘푹 퍼진’ 외모를 떠올린다. 특히 미혼여성들은 촌스러운 패션과 펑퍼짐한 몸매, 뽀글뽀글한 파마 머리, 흐트러진 자세 등 더이상 아름다움을 유지하지 못하는 외모에 대한 무신경을 가장 못마땅해한다. 더이상 여자이기를 포기한 부류라는 것이다.

아줌마는 정말 촌스러운가

나이가 들면 외모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지만 여성의 경우 몇번의 임신과 출산을 거치면서 그 변화가 더욱 뚜렷해진다. 살이 찌고, 피부는 점점 탄력을 잃어가고, 잔주름도 생긴다. 부드럽고 곱던 손은 ‘일하는 손’으로 굳어진다. 더이상 성적으로 매력적이지 않은 몸을 갖게 된다. 이런 아줌마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여자이기를 포기한 여자’다. 이 시선은 역으로 보면 젊은 20대 여성에게는 날씬하고 아름다운 외모가 너무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성 역시 나이가 들면 아랫배가 나오고, 머리숱이 줄어들고, 패기마저 줄어들고, 성적 매력도 사라지지만 아저씨의 외모가 문제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우리 나라 20대 여자들만큼 외모 가꾸기에 열심인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대학생이든 직장여성이든 너나 없이 뛰어난 화장술을 갖고 있다. 화장을 하지 않은 미혼 여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패션감각도 뛰어나다.

배낭여행을 다니다 보면 우리 나라 대학생은 물론 외국의 대학생도 많이 만나게 되는데 화장한 다른 나라 젊은 여성 여행자는 거의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미국·캐나다·유럽 각국, 심지어 같은 동양권인 홍콩·싱가포르·일본의 여자 대학생과 젊은 직장여성도 마찬가지였다. 너나없이 여행하기에 편하고 좋은 차림인 데 반해 우리 나라 젊은 여성 중에는 화장하지 않은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헤어드라이를 가지고 다니면서 알뜰하게 머리 손질을 하는 여성도 있었다.

짊어지고 다니는 배낭에서도 눈에 띄는 차이가 난다. 외국 배낭객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침낭·취사도구·여행 중에 읽을 책·여행노트·가이드북이 주된 짐이 되고 배낭의 크기나 무게도 만만찮다. 같은 크기의 배낭이라 해도 우리 여대생들의 배낭은 옷가지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우리 나라의 젊은 여성은 외모 가꾸기에 열심이다.

여성의 중요한 가치가 날씬함, 여성스러움, 아름다움으로 인식되는 것은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남성의 시선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아줌마들의 입장에서 보면 화장하지 않아도, 청바지에 티셔츠 하나만 입어도 자신 있는 젊음이 아름다워 보이는데 정작 젊은 여성들은 젊음과 아름다움의 유지만을 여성의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고, 여성스러움은 곧 아름다움이라는 신화에 빠져 있는 듯이 보인다. 이처럼 외모 가꾸기에 열심이었던 여성에게 나이가 들고 늙어간다는 것은 분명 두려운 일일 테고, 그 두려움을 현실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푹 퍼져버린 아줌마들의 외모’일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곧 성숙을 의미한다. 인생의 경험이 쌓이면서 보다 관대해지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고, 유혹에도 고통스럽지 않고, 무익한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외모에 대한 태도에 따라 그것은 상실이 되기도 한다. 상실로 여길 경우 늙음은 곧 추함이 되고, 아직 아름다운 젊은 여성에게 아줌마란 ‘푹 퍼져 더이상 여자이기를 포기한 여자’가 되어버린다. 늙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하지만 남성보다 여성이 ‘보다 젊게 보이기’(looking younger)
위해 안간힘을 쓰는 까닭도 여성을 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말을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젊다고 하면 은근히 좋아하는 심리 때문에 백화점 의류코너 판매원들은 “어머, 언니가 아니고 엄마라구요? 전 30대인 줄 알았어요” 하며 호들갑을 떤다. 그럴 경우 상품을 살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아줌마들이 육체적 젊음에서 자신감을 찾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겪는 삶의 무게를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인식하는 경우도 많다. 가식과 내숭으로 남성의 눈치 보기에 주눅들었던 20대의 굴레에서 벗어나 몸이란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인생의 도구임을 알게 되고, 출산·육아 등 다양한 경험을 통해 젊고 예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님을 체득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아줌마다.

그러나 아줌마가 젊을 때의 패션감각을 잃어버리고 외모에 신경을 안 쓰는 이유가 다만 남성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줌마의 외모에 대한 아줌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처녀 적에는 저도 13만원짜리 파마도 해봤습니다. 파마를 하기 위해 2시간 넘게 미용실까지 차를 타고 간 적도 있습니다. 하루 날 잡고 미용실에 앉아 내 마음에 쏘옥 드는 헤어스타일을 위해서는 이렇게 비싼 곳까지 와야 한다고 자신과 대화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4만원이요? 뭐가 그렇게 비싸요? 코팅 빼고 해주세요…. 은행에서 10만원 찾은 지가 언젠데 머리 하는 데 4만원을 써’하고 나도 모르게 내뱉었습니다. 결혼 전 파마 값으로는 그럴 수도 있는 가격이지만 지금 아줌마인 제게는 너무 비쌉니다. … 단발머리는 자꾸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핀을 꽂고 일을 하니 꼭 ‘식순이’ 같고, 커트 생머리는 자고 일어나면 산발이 되어 머리 손질하기가 너무 불편하고…. 역시 아줌마들의 계산 끝에 나오는 최고의 머리는 짧게 볶아놓은 머리입니다. 특히 전업주부로서의 아줌마는 이 머리 스타일을 고집합니다. 중요한 집안 행사 때는 미용실에 가서 드라이로 펴주면 얌전한 중년층 아줌마 머리가 되니 좋고, 일할 때는 머리카락이 앞으로 쏠리지 않으니 좋고, 남자들의 눈을 의식할 이유가 없습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니까요.”(민금원,‘내가 아줌마 파마를 고집하는 이유’ 중에서)

조희숙 자유기고가
월간중앙(http://win.joongang.co.kr) 제 287호 1999.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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