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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Insight] 아메리카스컵 4회 우승의 전설, 러셀 쿠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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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바람의 힘으로 돛단배를 몰아 빠르기를 겨루는 요트 경주. 거친 자연에 맞서 인간 한계에 도전하고, 첨단 기술의 집합체인 요트와 동반 출전한다는 점에서 요트 경주는 지력과 체력, 돈과 기술력이 어우러지는 스포츠다. 10여 명의 선원을 이끄는 요트 팀의 선장은 여기에 리더십까지 겸비해야 해 지덕체(智德體)의 상징으로 꼽힌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요트대회인 아메리카스컵(America’s Cup)에서 네 차례 우승해 요트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러셀 쿠츠(48)가 지난달 29일 방한했다. 아메리카스컵의 사전대회 격인 월드 시리즈의 한국 개최 가능성을 타진하고, 한국팀의 출전을 협의하기 위해서다. 그는 1995년과 2000년 조국인 뉴질랜드에 아메리카스컵을 안겨준 뒤 스위스 팀으로 이적해 2003년 유럽에 첫 우승을 선사했다. 올해 2월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열린 대회에서 미국팀으로 출전해 네 번째 승리를 맛본 러셀 쿠츠가 요트와 리더십을 이야기했다.

글=박현영 기자
사진=송봉근·박종근 기자

벌어진 어깨, 구릿빛 피부는 ‘바다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쿠츠 선장에게 잘 어울렸다. 그는 소속 클럽인 미국의 ‘BMW 오라클 레이싱’ 팀의 로고가 새겨진 새하얀 셔츠를 빳빳하게 다려 입고 나왔다. 현재 ‘BMW 오라클 레이싱’의 최고경영자(CEO)를 맡고있다. 지금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지만 고향인 뉴질랜드 억양은 또렷했다.

●한국은 삼면이 바다지만 요트가 아직 낯선데.

 “바다가 주는 재미와 흥분을 아직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뉴질랜드도 비슷했다. 섬나라지만 요트는 인기가 없었다. 요트대회가 열려 관람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친숙해지고 도전의식도 생긴 것 같다. 스위스도 마찬가지다. 산이 많은 스위스도 요트 불모지였는데, 2003년 스위스 팀이 아메리카스컵에서 우승한 뒤 요트 바람이 불었다.”

 그는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직접 만들어 준 배로 처음 혼자 바다로 나갔다. ‘항해’의 시작이었다. “돛이 제대로 달린 나무 배였는데, 물 위에서 느낀 엄청난 자유를 잊지 못한다.” 뉴질랜드도 30여 년 전에는 지금 같은 요트 강국이 아니었다. 고교 시절 그가 ‘요트 선수가 되어 아메리카스컵에서 우승하는 게 꿈’이라고 장래 희망을 말했을 때 교실은 웃음바다가 됐다고 한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포부가 너무 크니 눈높이를 좀 낮추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을 정도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요트의 매력은 뭔가.

 “엔진 없이도 배가 엄청난 속력을 낸다고 상상해 봐라. 바다에 나가 돛을 올리면 파도와 바다, 바람이 돛을 지나가는 소리만 들린다. 바다는 매일 다르다. 바람이 한 번도 같을 수 없고, 그래서 바다에 나갈 때마다 새로운 걸 배운다. 육체뿐 아니라 머리까지 단련한다. 물 위에서 하는 체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머리를 단련한다는 건 무슨 뜻인가.

 “보트가 바람 속으로 들어가면 태그(좌우 45도 바깥으로 지그재그로 왔다 갔다 하며 전진하는 기법)를 해야 한다. 각도, 타이밍, 바람이 만들어내는 힘을 계산하는데 수학, 삼각법, 물리 지식이 총동원된다. 많은 선수가 학창 시절 가장 좋아했던 과목이 수학이더라. 경험이 쌓일수록 자연에서 오는 직감도 물론 중요해진다. 물을 보고 바람의 방향을 읽는 것처럼 말이다.”

 아메리카스컵은 자국의 기술로 건조된 배로 참가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선박 설계, 유체 역학, 시뮬레이션, 조선 기술, 소재 연구, 기상학, 항해학, 기하학, 물리학 등 기초과학과 첨단 기술을 겨루는 국가 기술 경연장이다. 경기 참가에 막대한 예산이 투입됨에 따라 국가의 해양 기술과 경제력, 조직 경영과 스포츠 마케팅이 경쟁하는 마당이다.

●돈을 많이 들여야 우승에 가까워지는 건가.

 “단순히 돈을 얼마 쓰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돈은 승리 요인 중 한 가지에 불과하다. 지난 30년간 아메리카스컵을 살펴보면, 가장 많은 돈을 쓴 팀이 우승하지 못했다. 1995, 2000, 2003년 우승했을 때 우리 팀은 예산 규모에선 5위에 불과했다. 올해는 예외였다. 우리 팀이 돈을 가장 많이 썼고, 우승했다.”

 아메리카스컵에 참가하는 팀은 하나의 기업이다. CEO가 선수와 엔지니어, 스태프 200여 명을 이끌고 기술, 훈련, 예산, 경영을 진두지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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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트 대회는 자본·기술·체력의 경연장” #“유능하나 융화 못 하는 사람, 우리 요트팀엔 사절”

●강한 팀을 만드는 비결이 있나.

 “좋은 팀원을 선발하는 게 제일 우선이다. 사람을 매우 조심스럽게 고른다. 자질은 기본이고,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인지, 주변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지 본다. 재능은 있지만 융합하지 못하는 사람은 뽑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끼면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가 변화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방법도 있지만, 성공하는 걸 못 봤다. 새 팀원을 선발할 때 기존 팀원을 참여시켜 결속력을 높인다.”

●리더십 철학이 있다면.

 “사람들이 스스로 창의적으로 일할 수 있게끔 해줘야 한다고 믿는다. 리더는 비전이나 목표를 설정하고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게 임무다. 준비를 많이 한 팀은 바다에서 시간을 벌 수 있다. 상대가 어떤 전략을 쓸지 모든 경우의 수를 그려보면 상대의 액션이 나왔을 때 여유 있게 대응할 수 있다. 더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뜻이다.”

●중압감, 스트레스를 어떻게 다스리는가.

 “나는 누구보다 승부욕이 강하다. 경기가 시작돼 보트 위에 있으면 긴장감을 전혀 못 느낀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다. 물론 중압감이 클 때도 있다. 그럴 땐 자신에게 묻는다. ‘저기 관중석에서 구경하는 게 좋겠니, 아니면 여기서 경쟁해서 이기는 게 더 낫겠니’ 그러면 답은 하나다.”

 쿠츠는 아메리카스컵에 여러 가지 이정표를 세웠다. 1995년, 2000년 뉴질랜드 팀으로 우승해 미국이 아닌 나라에서 우승컵을 방어한 첫 주인공이 됐다. 뉴질랜드의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을 때 그는 홀연히 스위스로 이적했다. 아메리카스컵 우승을 염원하며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던 스위스 팀의 스카우트 제안을 승낙하자 “돈에 팔려 나라를 배신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가 돈 때문에 스위스에 간 것은 아니었다. 아메리카스컵 패권을 되찾으려는 미국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사 회장을 통해 거액의 스카우트를 제안했지만 그는 모든 조건이 훌륭히 갖춰져 있는 미국을 택하지 않았다.

●하필 산악 국가 스위스로 간 이유는 뭔가.

 “한 번 사는 인생 아닌가. 나는 하루 하루를 도전하며 살고 싶었고, 지금도 그렇다. 아무도 스위스가 우승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큰 모험이었고, 그만큼 큰 기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2003년 친정인 뉴질랜드 팀을 누르고 스위스에 우승컵을 안겨줬다. 바다도 없는 나라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비웃음을 간단히 날려버렸다.

① 2010년 2월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열린 제33회 아메리카스컵 요트대회. 지난 대회 우승자인 스위스의 알링기 5호(왼쪽)와 도전자인 미국 ‘BMW 오라클 레이싱’ 팀의 USA호가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② 대회 둘째 날 ‘BMW 오라클 레이싱’ 팀의 USA호가 멋지게 항해하고 있다. ③ 우승을 거머쥔 ‘BMW 오라클 레이싱’ 팀이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환호하고 있다. 왼쪽에서 둘째가 이 팀의 러셀 쿠츠 최고경영자(CEO). 왼쪽에서 셋째는 팀을 만든 선주이자 후갑판원으로 승선한 래리 엘리슨 오라클 창업주 겸 CEO.

●네 차례나 우승했는데, 승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뭔가.

 “안주하는 것. 물론 쉽지 않다. 자신을 끊임없이 다그치고, 단련해야 한다.”

 그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이번에는 경영자로서 새로운 아메리카스컵을 선보이는 것이다. 우승한 국가가 다음 개최 장소와 시기를 결정하는 관행 때문에 미국과 오세아니아·유럽에서만 진행되던 대회를 아시아·중동 등지로 넓히려는 시도다. 본선에 앞서 사전대회 격인 월드 시리즈를 신설해 아시아와 중동을 돌며 투어를 개최할 계획이다.

●현실적으로 한국의 대회 유치 가능성은.

 “매우 높다. 환경이 좋은 편이다. 국제 요트대회를 연 경험도 있고, 조선업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아메리카스컵은 자국에서 건조한 요트로 출전해야 하기 때문에 조선 기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제주도는 매우 아름다운 곳이고, 부산 해운대 쪽은 인프라가 좋다.”

●대회 개최의 긍정적 효과는 뭘까.

 “아메리카스컵은 최고급 기술 경연의 장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국의 최고급 과학기술을 뽐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뉴질랜드는 아메리카스컵 우승 이후 대형 럭셔리 요트인 ‘수퍼요트’ 산업이 크게 성장했다. 한국도 지금보다 더 부가가치가 큰 배를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다.”

●경제 효과는 얼마나 되나.

 “아메리카스컵은 경제적 효과에서 올림픽과 월드컵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국제 스포츠 행사다.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열린 아메리카스컵은 27억 유로(약 4조원)의 경제 효과를 가져온 걸로 추산됐다. 201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릴 대회는 직접 지출만 17억 유로(약 2조6000억원)로 예상된다. 물론 월드 시리즈는 이보다 작은 규모이겠지만 요트산업뿐 아니라 관광, 기업 마케팅 관련 산업의 발전도 견인할 것이다.”

 그는 한국과 인연이 남다르다. 86년과 87년 한국에 머물며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앞둔 선수들을 지도했다.

●한국은 언제쯤 아메리카스컵에 진출할 수 있을까.

 “다음 대회(2013년)가 기회다. 천문학적인 비용 경쟁을 자제하고, 대회 본연의 가치를 높이는 데 충실하기 위해 경기 규칙이 새로 짜였다. 새로운 장이 마련된 이때가 신생 팀이 진입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다. 기존 팀들의 강점은 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게임이 돼 출발선이 같게 됐다. 한국에 요트를 타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오히려 반가웠다. 한국인들이 더 많이 참여하도록 만들고 싶다. 한국인들이여 도전하라.”

아메리카스컵 159년 역사

“폐하, 송구하오나 아메리카호만 보입니다”

1848년 순은으로 제작된 아메리카스컵 트로피. 실제 사용되고 있는 트로피 중 가장 오래 됐다.

1851년 8월 22일 오후 5시45분 영국 와이트섬 앞바다. 미국에서 온 요트 ‘아메리카’호와 영국 왕실 함대 소속 요트 14척이 섬 주변 약 85㎞를 돌아오는 경주가 열리고 있었다. 배가 출발한 지 7시간이 넘어가자 소식이 궁금해진 빅토리아 여왕은 순시선을 보내 상황을 살피게 했다. 돌아온 선장에게 여왕이 물었다.

 “요트가 시야에 들어오는가?”

 “송구하오나, 폐하, 아메리카호만 보입니다.”

 “2등은 어느 배인가?”

 “그게…여왕 폐하, 2등은 보이지 않습니다.”

 약 3시간 후, 아메리카호가 1등으로 들어왔다. 신생국 미국의 아메리카호가 빅토리아 여왕이 개최한 요트 대회에서 ‘무적’ 영국 함대를 물리치고 우승컵을 차지했다. 대회 이름이 아메리카스컵(America’s Cup)이 된 유래다.

 이 대회는 미국이 당시 적대국이자 최고의 해양강국인 대영제국에 승리한 대사건이었다. 이후 영국은 모든 해양 기술을 동원해 미국에 대항할 배를 만들었지만 한 차례도 미국을 이기지 못했다. 미국이 영국을 따라잡는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됐다. 이후 미국은 1983년 호주에 우승컵을 빼앗기기 전까지 무려 132년간 우승을 싹쓸이했다. 미 항공우주국(NASA)이 개발한 미국 요트의 독주는 미국의 패권을 상징했다.

 아메리카스컵은 국가를 대표하는 2대의 최첨단 세일링 요트가 1대1로 맞붙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국가 대항전의 성격을 띠지만 국가대표가 아닌, 각국 클럽 팀이 출전한다. 그 때문에 유능한 선수를 스카우트해 와 출전하는 것도 가능하다. 선장을 포함한 선원 10여 명으로 짜인 두 팀이 바람의 힘으로 배를 몰아 정해진 코스를 먼저 돌아오는 속도를 겨룬다. ‘바다의 포뮬러 원(F1)’으로 불리는 이유다. 대회는 3~4년마다 한 번씩 열린다.

 요트는 바람 같은 기상 여건에 따라 성적이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여러 날 경기를 한다. 아메리카스컵 결승전은 우승자와 도전자가 하루에 한 번, 약 3㎞ 거리를 경주하는데, 2시간 정도 걸린다. 9전5선승, 최근엔 3전2선승 등의 경주를 통해 우승자를 가린다.

 159년 역사의 아메리카스컵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국제 스포츠 행사다. 근대 올림픽(1896년)보다도 45년 앞섰고, 데이비스컵 테니스 대회(1900년)나 월드컵축구 대회(1930년)보다 역사가 훨씬 길다. 역대 우승국은 미국·호주·뉴질랜드·스위스 4개국이 전부다. 미국과 유럽에 편중돼 있는 요트에 대한 관심을 세계적으로 퍼뜨리기 위해 차기 대회(2013년)부터 아시아와 중동 등 세계 도시를 돌며 요트 경기를 펼칠 계획이다.

j 칵테일 >> ‘비행기 날개를 돛으로 …’ 군비 경쟁 뺨치는 요트 경쟁

아메리카스컵 출전팀은 자국의 기술로 만든 배로 참가해야 한다. 이 때문에 선수들의 땀 못지않게 과학자의 기술, 해양 강국의 돈과 자존심 싸움이 치열하다. 최첨단 소재와 역학 기술을 총동원해 만드는 요트는 웬만한 항공기보다 비싸기도 하다. 올해 아메리카스컵에서 우승한 미국의 BMW오라클 팀의 요트 USA호는 제작비가 수백억원대인 것으로 추산됐다. 모험가이며 세계 2위의 소프트웨어업체 오라클의 창업자이자 최고 경영자(CEO)인 래리 엘리슨(사진)이 선주로 나서 비용을 댔다. 이 배는 항공기 제작에 쓰이는 역학 기술을 응용해 돛을 만들어 ‘비행기 날개를 돛으로 단 배’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이런 디자인이 가능했던 건 예년과 달리 배의 길이·너비·무게 등 규격에 대한 제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승자와 도전자가 대회 규칙에 합의하지 못하는 바람에 끝내 분쟁을 법원으로 가져가는 사태가 일어났고, 주최 측은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요트를 만들라”는 ‘무제한’ 가이드라인을 내놓게 됐다. 러셀 쿠츠 선장은 “그 시점에 가서는 예산 경쟁이 아니라 군비 경쟁(arms race) 수준이 됐다”고 말했다. 스위스팀 선주인 유럽의 억만장자 기업가 에르네스토 베르타렐리와, 미국의 래리 엘리슨이 재산을 쏟아넣어 각각 최첨단 요트 만들기 경쟁을 시작했고, 올해의 승자는 래리 엘리슨이었다. 엘리슨은 후갑판원으로 승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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