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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리포트] 어린이집 시설 허용 기준 완화했더니 직장맘들 환호 … 업무 능률 쑥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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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에 ‘규제 전봇대 뽑기’라는 말이 유행했다. 이 대통령이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 전남 영암군 대불산업단지 도로의 전봇대를 규제의 대표적 사례로 들면서 생긴 말이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2008년부터 올 10월까지 업계는 1999건의 규제 완화를 정부에 요구했다. 이 중 62.5%(1249건)가 전면 혹은 부분적으로 개선됐다. 이 중에는 그 효과가 피부에 와닿는 것이 많다. 어린이집 시설을 정원 규모에 따라 1∼3층까지로 제약해 오던 규정을 약간 고치자 여직원들의 업무효율성이 놀라보게 높아졌다. 대기업에만 유리하던 건설 입찰이나 정부 납품 정책에 손질을 가하자 “공정해지고 있다”는 말이 들려온다. 특히 부분적으로 완공된 공장의 지붕에도 태양광 집광판을 설치할 수 있도록 제도가 정비되면서 태양광발전이라는 신성장동력의 활로가 열리고 있다.

문병주 기자

SK C&C 사내 부부인 김민환 과장(왼쪽)과 주경옥씨(오른쪽)가 쉬는 시간에 경기도 분당사옥 내 어린이집에 들러 세 살배기 아들 재준군을 만나고 있다. 재준군은 3년째 이 어린이집에 다닌다. [SK C&C 제공]

3일 오전 8시30분 경기도 분당 정자동의 SK C&C 본사 건물 3층 ‘늘 푸른 어린이집’. SK C&C 사내 부부인 김민환(36·인력개발팀) 과장과 주경옥(30·기술혁신센터) 사원은 아들 재준(3)군에게 “점심 때 얼굴 보러 올게”라며 위층 사무실로 향했다. 김 과장은 “영유아 보육법 규정이 바뀌지 않았다면 맞벌이하는 아내가 휴직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고 말했다. ‘정원 50명 이상인 어린이집은 반드시 1층에 위치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회사 부속 어린이집을 확장하는 일이 어려웠다. 정원이 49명에 그치니 어린 순서로 만 2세까지 아이만 맡길 수 있었다.

 ◆여성에게 환호받은 어린이집 규제 완화

 SK C&C는 지난 3월 어린이집 규모를 258㎡에서 약 500㎡로 넓혔다. 정원이 76명까지 늘어나니 만 4세까지 맡길 수 있게 됐다. 이 회사 인력본부장인 이강무 상무는 “2007년부터 보육법 개정을 줄곧 요구해 지난해 관철됐다. 어린 자녀가 있는 여성 직원들의 업무 집중도가 크게 높아졌다”고 전했다. 보육시설 규제 완화는 여성 직원이 상대적으로 많은 유통업체에서 더욱 절실하다. 영유아보육법상 직장보육시설은 근로자 500명 이상 또는 여성 근로자 300명 이상 사업장에 반드시 설치해야 하는데 안전문제 등을 이유로 건물 1∼3층만 허용해 기준이 너무 까다롭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의 경우 직원식당과 가까운 오피스동 15층에 어린이집을 만들 계획이었다. 백화점 특성상 매장이 있는 층에 어린이집을 만들면 방문객이나 어린이 모두 불편하다. 그래서 직원식당과 어린이집을 맞붙여 점심시간 때 자녀들을 한 번씩 보고 갈 수 있게 하려는 배려였다. 하지만 관련 규정에 막혀 그럴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자동차로 20분쯤 걸리는 서울 재동 2층 주택에 어린이집을 만들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선진국 수준의 피난시설과 피난로 등을 갖추고 관리를 잘 하면 어린이집의 층고 제한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내년 3월 직장보육시설 층고 제한을 3층에서 5층으로 완화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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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지식한 규제 풀어 태양광 활성화

 충남 아산 탕정에 액정표시장치(LCD) 공장을 증설 중인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 한국남동발전(발전 투자)·삼성에버랜드(설치 시공)와 손잡고 1만2834㎡ 면적의 LCD 모듈 생산동 건물 옥상에 태양광 집광판을 설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LCD 생산에 필요한 전력을 1.2메가와트(MW) 정도 충당해 연간 2억원 정도의 전기료 절감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산업집적 활성화 및 공장 설립에 관한 법률’ 등 관련 법규가 제동을 걸었다. 임대사업을 하려면 공장 건설이 완료된 이후에만 가능토록 돼있기 때문이었다. 탕정 단지는 현재 삼성전자가 공장 건물을 계속 늘리고 있어 전체 공장이 완성되려면 4년 정도 기다려야 한다.

 이에 대해 지식경제부는 ‘태양광 발전시설을 설치할 때 공장 설립 완료 신고 전에도 가능하다’는 유권해석을 최근 내렸다. 한국남동발전의 위재훈 차장은 “산이나 농지를 훼손하지 않고도 태양광발전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라며 “태양광사업 계획을 충남도에 제출하고 허가가 나면 90일 안에 시설을 만들어 발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입찰 문턱 낮춰 될성부른 중소기업 진흥

 대기업에 유리한 각종 심사 기준은 중소기업의 성장을 막는다. 책상·캐비닛 등을 생산하는 부산 중소기업 K사는 공공기관에 납품하고 싶었지만 입찰 참여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조달청은 약 30만 종의 물품을 다수공급자계약 제도로 구매한다. 여기에 참가하려면 평균 13일 걸리는 검사 준비는 물론 한 품목에 100만원 정도의 비용을 들여야 했다. 특히 납품액 1억원 이상의 기업일 경우 소수 업체로부터 제안서를 받아 최종 납품업체를 선정하는데, 이 입찰에 들어가려면 평균 57종의 가구를 직접 생산해야 한다. K사 관계자는 “이런저런 요건을 다 맞추는 일이 규모가 작은 업체엔 어림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조달청은 최근 전국을 돌며 이와 관련한 업계 공청회를 열고 있다. 우선 공인기관의 납품 검사에 합격하면 이듬해 검사를 면제해 주기로 했다.

 조달청은 중소 건설업체의 입찰기준도 완화했다. 경기도 포천의 N건설은 2년 전 LH공사에서 발주한 도로공사에 단독 입찰하려 했지만 공사실적이 부족해 실적이 많은 업체와 공동 참여 형식을 취했다. 시공 경험 평가 때 해당 공사 규모의 1.2∼2배 되는 공사 경험이 있어야 만점을 받을 수 있다는 제약에 걸려서다. 이 회사는 시공실적이 나은 대형업체에 49% 지분을 주고 협력하기로 했다. 조달청은 지난 6월 시공경험 평가 만점 기준을 해당 공사 규모의 1∼1.5배로 완화했다. 그 결과 단독 수주 가능업체의 비율이 6.2%에서 19.8%로 늘었다.

 ◆법 고치기 힘들면 시행령부터

 ‘규제의 전봇대’는 여전히 산업현장 곳곳에 산재해 업무효율과 신성장동력을 약화시킨다. 법제처에 따르면 10월 현재 1121개 산업의 50.2%가 진입을 규제받고 있다. 특히 인·허가 규제의 99%는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포지티브 방식이다. 박종남 대한상의 조사2본부장은 “규제는 창업에 의한 고용창출 능력을 떨어뜨리고 창의적인 개발과 투자를 가로막아 국가경쟁력을 갉아먹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이 대통령은 제23차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회의에서 “필요한 건 법령 개정 때까지 미루지 말고 시행령부터 바꾸라”고 규제 완화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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