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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읽기] 독일 통일 위해서라면 사탄 손도 잡았을 야망의 화신 … 비스마르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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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비스마르크 평전
강미현 지음, 에코리브르
768쪽, 3만8000원

리뷰 = 최호근 박사(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서양사)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역사에도 신화가 된 사람들이 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98)가 그 중 하나다. 국익을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했던 철혈재상, 역경 속에 일구어낸 독일 통일의 아버지.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비스마르크 신화다. 그러나 또 다른 신화도 있다. 국민의 이익보다 국익을 앞세웠던 정치가, 기업가를 위해 노동탄압까지 서슴지 않았던 지도자,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아 히틀러의 등장을 초래한 독일사의 파괴범. 이 중 어떤 것이 진짜 비스마르크의 얼굴일까?

1871년 독일 통일의 주역 비스마르크. 1990년 재통일 이후 다시 주목 받고 있다. [에코리브르 제공]

 반갑게도 우리 가까이에 있는 중견 학자가 이 물음에 단서를 주는 책을 냈다. 20년 동안 비스마르크와 씨름해온 저자 강미현 박사는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일어나고 있는 ‘비스마르크 신드롬’의 이유를 독일인들의 불안 속에서 찾는다. 정교한 로드맵 없이 재통일을 맞이한 독일인들이 1871년 통일의 주역이었던 비스마르크의 생애 속에서 어떤 단서를 발견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수적인 토지귀족 출신의 아버지와 자유주의적인 교양시민계급 출신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비스마르크는 19세기 독일사의 발전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는 정치적 성향에서 철저한 프로이센주의자였다. 저자는 그가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통일에 도움이 된다면 “사탄의 손이라도 덥석 잡을 위인”이었다고 말한다.

 비스마르크는 확실히 야망의 화신이었다. 33세의 젊은 나이에 프로이센 의회 보결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그는 ‘꼴통 군주주의자’로 낙인찍혀 1848년 혁명기에 낙선하는 좌절을 겪는다. 그러나 바로 그 소신 때문에 혁명이 실패한 후 국왕에게 독일연방 의회의 프로이센 대사로 발탁되어 8년 동안 정치와 외교의 감각을 몸에 익히게 된다.

 국왕에 대한 충성과 외교적 수완에 힘입어 러시아와 프랑스에서 대사직을 역임한 그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온 것은 1862년이었다. 수상에 전격 임명된 것. 그는 프로이센 왕실과 정치적 반대파, 독일의 수많은 영방국가들과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 열강과 수없이 갈등을 겪은 후 마침내 독일 통일의 위업을 이룩한다. 그 후 20년 넘게 유럽 정치외교의 중심에 선 인물은 단연 비스마르크였다.

 저자는 그 이유를 비스마르크의 유연하고 실용적인 태도에서 찾았다. 비스마르크는 확신에 찬 보수주의자였지만, 보수주의의 길은 하나가 아니라고 믿었다. 때로는 배신자 소리를 들으면서도 자유주의자들과 타협했다. 비스마르크의 파격적 행동은, “큰 막대기를 물고 숲을 빠져나와야 하는 사냥개라면 상황에 따라 다르게 대처해야하지 않겠냐”는 그의 반문을 통해 충분히 설명된다.

 비스마르크의 이런 태도는 외교노선 변화에서 잘 나타난다. 수상 취임 초기 그의 목표는 오스트리아를 따라잡는 데 있었다. 그러나 1864년 덴마크와의 전쟁에서부터 그의 외교노선은 철혈정책으로 바뀐다. 오스트리아·프랑스와 연이은 전쟁을 승리로 마감한 직후부터 그의 외교는 다시 힘의 균형에 의거한 동맹정책으로 전환된다. ‘동맹 중독자’라는 오명을 들으면서도 그가 3황제 협정과 3국 동맹을 연달아 성립시킨 것은 최소의 비용으로 유럽의 안정과 독일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정치와 외교 리더십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곰곰히 생각해보게 하는 평전이다. 독일 토지귀족의 개인사적 편력, 통일로 나아가는 독일사의 격랑, 소요와 격변으로 점철된 유럽 역사의 파랑을 생생하게 파악하는 또 다른 즐거움은 이 평전을 직접 접하는 독자의 몫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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