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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20) 저격능선의 혈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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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50년 10월 25일, 평양 시내로 입성하는 백선엽 장군의 국군 제1사단 장병. 어렵게 수복한 평양은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곧 내줘야 했다. 전쟁을 치르면서 무섭게 성장한 국군은 훗날 중공군과 단독으로 맞붙어 이길 만큼 전력이 강화됐다. 경기문화재단이 펴낸 『한국전쟁 60주년 자료집』에 수록된 사진이다.


최근 연평도 사태를 보면서 여러 가지로 피가 끓었다. 북한이 변했다거나, 아니면 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그동안 적지 않았다. 그러나 연평도 사태에서 보듯이 북한은 결코 그 본질이 변하지 않는 존재다. 그런 북한을 지켜보면서 나는 6·25전쟁 당시 매우 치열하게 벌였던 고지전을 떠올렸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내가 고지전이 벌어지는 현장을 직접 찾아간 적이 있었다. 강원도 철원·김화 북방의 저격능선이라는 곳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1951년 진격하는 미군을 중공군이 능선 곳곳에서 저격했던 곳이라서 미군들이 ‘저격능선(Sniper ridge)’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철원-김화-평강을 잇는 지리적 삼각지대는 철의 삼각지대로 불렸는데, 이곳을 장악하기 위해선 해발 590m의 이 천연 고지를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그래서 이곳은 자연스레 주목을 받았다.

 이 전투는 앞서 벌어졌던 수도고지·지형능선·백마고지, 그리고 단장의 능선 전투 못지않게 처절했다. 무려 42일 동안 전투가 벌어져 모두 12차례에 걸쳐 고지의 주인이 뒤바뀌었던 곳이다. 당시 적과 싸웠던 주력은 국군 2사단이었다.

 국군과 미 7사단 일부는 이곳에서 먼저 중공군을 공격했다. 국군은 저격능선 일대의 중공군을 공격했고, 그 북방의 삼각고지라는 곳에서는 미 7사단의 병력이 중공군을 몰아갔다. 전투는 아주 처절하게 펼쳐졌다. 국군이 이 능선 일대에 있던 중공군을 몰아낸 뒤 고지를 빼앗았다가 내주기를 반복하면서 피아(彼我) 모두에서 엄청난 희생자가 났다.

 중공군은 1700여 명이 사살됐고, 아군은 450여 명이 전사하고 17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고지에 올랐던 아군은 정말이지 철모를 벗을 틈도 없이 싸우고 또 싸웠다. 희생이 컸던 까닭에 대구의 육군본부에 있던 나는 그 현장을 찾아갔다.

 내 기억으로는 늦가을이었다. 고지 전투가 종료된 때가 11월 24일인데, 내가 간 때는 그 바로 직전이었을 것이다. 나는 당시 국군 2사단을 이끌고 있던 김웅수 장군을 격려하기 위해 현장을 찾았다.

김웅수(1923~ )

 김웅수 사단장은 내가 2군단을 이끌고 있을 때 참모장을 지냈던 부하였다. 전선을 이끌고 있던 그는 매우 박력이 넘쳤다. 김 장군은 우선 짜임새가 아주 단단한 인물이었다. 빈틈이 없었다. 일선의 사단장으로 격전을 치르고 있었지만 대단히 활기찼다. 그는 “부족한 것은 없냐”는 내 물음에 “모두 충분합니다.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며 힘차게 대답을 했다. 그때 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국군은 어느 장소, 어느 때를 불문하고 앞으로 나섰다. 적이 앞에 있으면 반드시 총과 대포를 쏘았고, 적이 쳐들어오면 목숨을 걸고 앞으로 나아가 그들을 물리치기에 흔들림이 없었다. 당시 저격능선 고지 작전은 미 9군단의 지휘를 받고 있었는데, 미군은 포격과 공중 지원을 아끼지 않고 이곳에 집중했다.

 김웅수 사단장은 모든 보급과 지원에 문제가 없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머물지는 않았다. 힘을 보태주는 격려 차원의 방문이었지만, 당시 전선에 나가 있던 국군은 이처럼 치열한 투지(鬪志)로 넘쳐나고 있었다. 더 이상의 격려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애초 중공군이 들어섰던 이 고지와 능선을 우리는 피와 땀으로 빼앗았다. 중공군은 이 고지를 되찾기 위해 계속 파상(波狀)적인 공세를 펼쳤으나 전투가 끝날 무렵에는 결국 이 고지를 포기한 채 공격을 중지하고 수색전으로 전환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고지는 53년 7월 휴전협정 직전에 다시 중공군에게 내주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은 갈 수 없는 땅이다. 가슴이 저려올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그 많은 눈물과 땀, 피와 살로 얻은 고지였으나 결국 적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으니 통탄을 금할 수 없다.

그때의 전투는 모두 처절했다. 6·25 개전 초기의 대규모 기동전, 그리고 이어 벌어진 지연전과 낙동강 교두보 혈전 등이 모두 대단위 병력을 움직이는 혈전의 연속이었다. 51년 이후 벌어진 고지전은 규모 면에서는 그에 비해 떨어지지만 사람의 목숨을 내걸고 벌이는 전투의 강도로 볼 때는 결코 뒤지지 않는 싸움이었다.

 적이 내뿜는 총탄과 포탄을 뚫고 올라가 마침내 고지를 차지한 뒤에도 끝없이 덤벼드는 중공군의 집요한 공세를 막아내야 했다. 밤과 낮을 구별할 틈도 없이 적을 맞아 싸우고 또 싸워야 했다. 적을 눈앞에 두고 죽느냐 사느냐를 결판내야 하는 싸움이라는 점에서 51년부터 휴전 직전까지 불붙었던 고지전은 필설(筆舌)로는 모두 형언하기 힘든 참혹한 전투였다.

 그러나 그런 전투에서 아군의 지휘관과 장병 모두 촌보(寸步)도 물러서지 않았다. 우리의 지휘관은 단호하고 용맹했으며, 그 밑의 장병은 목숨을 내거는 분투로 적을 막아내고 공격했다. 51년 중공군에게 쫓겨서 내려온 뒤 반격을 위해 설정한 임진강~양양의 캔자스 라인(Kansas line)에서 훨씬 북상한 지금의 휴전선은 이런 덕분에 지켜졌다.

 그 한 치의 땅, 그 한 움큼의 흙에도 당시 우리 국군과 유엔군이 흘린 피와 땀이 그대로 서려 있다. 고지를 지키기 위해 적에게 죽음으로 맞선 우리 장병의 혼이 그대로 담겨 있는 땅이다. 내가 자주 말하는 대로 ‘1인치도 거저 얻은 것이 없는 땅’인 것이다.

 전쟁 초기에 자주 무너지곤 했던 국군은 미군의 화력 지원에 힘입어 중공군에 강하게 맞서고 있는 군대로 성장했다. 52년 가을과 겨울은 전선에서의 치열한 전투, 후방에서의 긴박한 재건 움직임이 교차하면서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대한민국 군대가 적 앞에 몸을 사리지 않는 정신으로 무장한 군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무기와 장비까지 제대로 갖춘 현대적인 강군으로 발돋움하는 기회는 정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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