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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cover story] 열여덟 혜원이의 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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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살 혜원이. 미소가 맑은 그녀는 '삐딱한' 아이였다. 부모나 선생의 말은 모두 잔소리. 귓등으로 흘렸다. 하고 싶은 일은 꼭 해야 직성이 풀렸다. 외박.음주.금품 갈취.집단폭행…. 더 놀고 싶어 학교도 때려치웠다. 흔히 말하는 '문제아'였다. 그러나 모두 지난 얘기. 혜원이는 더 이상 '불량소녀'가 아니다. 때론 힘에 부치기도 하지만 바른 길을 걷고자 노력하는 몸도 마음도 건강한 소녀다. 학교를 뛰쳐나갈 때 "제발, 내 마음대로 살게 내버려 둬"라고 소리치던 그녀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돌봐주신 어른들께 감사 드립니다." 혜원이의 '불량소녀 탈출기'. 그 짧지만 파란만장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맨발로 뛰노는 모습이 해맑기만 하다. "불량소녀"란 꼬리표는 짧은 방황도 참지 못하는 어른들의 편견이었을 뿐. 앞서 달리는 아이가 혜원이. 왼쪽이 상미, 오른쪽이 해리다.

◆ 왈가닥, '놀기' 시작하다

초등학교 시절 혜원이는 또래의 아이들과 다를 게 없었다. 좀 왈가닥이어서 가끔 사내 아이들을 두들겨 줬다는 게 유별난 점이랄까. 그녀가 '놀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아빠가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집안에 빨간 딱지가 붙게 됐고, 혜원네는 "살던 집의 반만한 아파트"로 이사해야 했다. 동네 분위기부터 아이들이 쓰는 말투까지 모든 게 낯설었다. 점점 소극적으로 변해갔고, 친구도 사귀지 못한 채 몇 달이 흘렀다. 그때 혜원에게 말을 건네준 친구가 지원(가명)이다. 지원이는 맞벌이 부모님 때문에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혜원이는 이런 지원이 집을 들락거리면서 노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그래봐야 학원 '땡땡이' 치고, 비디오 보고, 게임이나 하는 게 고작. 그맘때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행동이었다.

◆ "더 맞기 싫어 그만둘래요"

노는 데 몰두하면서 학교에 지각하는 일이 잦아졌다. 외모도 조금씩 불량스러워졌다. 오래지 않아 혜원이는 담임 선생님의 '눈엣가시'가 됐다. 타이름은 차츰 체벌로 바뀌었고 그럴수록 혜원의 반발심도 커갔다. 악순환. 담임은 무슨 일만 터지면 무조건 혜원을 불러 "알리바이를 대라"며 닦달했다. 혜원이는 그런 선생님이 미워 더 삐딱해졌다.

무단결석을 밥 먹듯 하던 시절. 혜원이는 남자친구와 '투투데이(22일째 되는 날)'를 기념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2200원씩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는 '일진회'가 됐다. 그나마 이런 생활도 2학년을 마치지 못한 2001년 말에 끝내버렸다. 퇴학생들과 지내다 보니 '학교 안 가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반 거짓말로 아빠.엄마를 설득, 자퇴를 해버렸다. 담임 선생님이 "그동안 맞은 게 아까우니 졸업은 하지"라고 빈정대더란다. 그런 선생님의 얼굴을 빤히 보며 혜원이 말했다. "더 다니면 더 맞잖아요. 그만둘래요."

글=남궁욱 기자<pariodista@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 점심시간, 용산 도시속작은학교 아이들이 "말뚝박기" 재미에 흠뻑 빠졌다. 뒤엉키고 투덕거리는 놀이 속에서도 아이들은 서로에게 희망을 가르친다.

*** 희한한 학교 만나다

자퇴 후 혜원이의 생활은 더욱 엉망진창이 됐다. 부모를 안심시키려 검정고시 학원과 입시전문 미술학원에 등록했지만 마음은 늘 '콩밭'에 있었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친구들과 어울려 비디오방과 PC방.노래방을 전전했다. 돈이 떨어지면 지나가는 아이들의 돈을 빼앗았다. 집에 들어가지 않는 날도 허다했다. 이런 혜원이의 어지러운 생활에 제동을 건 것은 엄마. 한 달 반 정도가 지났을 때 엄마는 "신문에서 좋은 곳을 봤다"며 혜원이를 서울 '도시속작은학교'로 데려 갔다. 작은학교는 한국청소년재단이 운영하는 대안학교. "옷 사준다"는 엄마의 말에 작은학교에 다니기로 했다. 첫 등교 날 혜원이는 교실 문 앞에서 생각했다. '에이, 괜히 다닌다고 했나. 좀 다니다 또 때려치워야겠다.'

결심(?)과 달리 혜원이는 작은학교 생활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선생님'이란 호칭 대신 이름을 부르며 까불어도 웃어주는 친구 같은 선생님들과 '어두운 과거'를 묻고 미래를 준비하는 자상한 언니.오빠들. 게다가 딱딱하기만 한 '국.영.수'는 미뤄두고 배우고 싶은 걸 가르쳐주는 수업까지. 혜원이는 새록새록 작은학교에 재미를 붙여갔다.

그렇다고 혜원의 방황이 단박에 끝난 것은 아니었다. 고입 검정고시까지 합격해 가며 마음을 잡아가던 혜원이는 2002년 다시 한번 유혹에 빠져들었다. 혜원의 발목을 잡은 것은 나영(가명)이. 작은학교마저 중퇴한 '날나리 나영 언니'와 친해지면서 혜원이는 수업을 빼먹으며 선생님들의 속을 썩이기 시작했다. "남자친구를 빼앗아간 나쁜 ×를 혼내주자"는 나영과 합세해 또래 여자애를 집단폭행했다 경찰서 신세까지 졌다. 역시 학교 선배였던 '현태(가명)오빠'와 설익은 연애도 혜원이를 힘들게 했다. 현태와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는 사이, 혜원이의 외박과 음주벽은 다시 시작됐다. 자신을 믿어주는 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이러면 안 된다고 다짐해 봐도 몸이 따르지 않았다. 스스로 "물 만난 고기처럼 술을 마시고 다녔다"고 떠올릴 정도로 험했던 혜원이의 방황은 1년 넘게 계속됐다.

*** 이젠 희망을 꿈꾼다

시간은 모든 아이를 철들게 한다.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아이들을 끝까지 지켜봐 주는 인내심뿐. 혜원이의 경우도 그랬다. 혜원이는 지난해 "이젠 힘들어 외박도 못하겠다"는 멋쩍은 농담과 함께 부모.선생님들 곁으로 돌아왔다. 혜원이가 '마지막 열병'에서 벗어났을 때 작은학교 선배들이 막 졸업했다. 아쉬움 속에 언니.오빠들을 떠나보낸 혜원이는 최고 학년이 됐고, 졸지에 학생회장에 뽑혔다. 작은학교의 학생회장은 특별하다. 선생님들과 학교 운영을 상의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때론 지난날의 자신 같은 후배들을 타이르기까지 해야 한다. 학생회장이 된 혜원이는 평생 달고 살던 '지각생' 꼬리표까지 끊어버리고 모범을 보이려 노력했다. 따르던 후배 선미(가명)가 가출하자 사방팔방 찾아나서기도 했다. 그 사이 혜원의 마음은 스스로 생각해도 부쩍 자랐다. "그동안 '멋지고 당당한 사람이 될 거야'라고 떠들기만 했지,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요."

혜원이는 올 초 작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과제물로 자서전 '나 이제 삐딱선에서 내린다'도 펴냈다. 작은학교 졸업과 함께 세상을 삐딱하게만 바라보던 방황기도 졸업하겠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 혜원이는 이렇게 썼다. "예전의 나도 나고, 지금의 나도 나다, 또 앞으로의 나도 나다." 어두웠던 과거를 부정하지 않는 자기애와 미래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각오가 함께 묻어나는 깨달음이다. 혜원이는 현재 디자이너의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 진학을 목표로 수능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처음에는 '스파르타식 기숙학원'에 들어갔지만 지금은 일반 학원에 다닌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스스로 통제할 줄 알게 된 혜원이에겐 지루하기만 하더란다. 하루 12시간씩 공부하는 강행군이지만, 혜원이는 늘 웃으며 얘기한다. "공부가 제일 쉬운 거같아요"라고. '범생이(모범생)' 같은 대사를 잘도 읊어대는 혜원이.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한 마디를 덧붙인다. "잘 모르시죠? 노는 게 얼마나 힘든데요! (웃음)"

*** '도시속작은학교'는 …

"기분이 안 좋은 날이면 '선생님, 나 우울해~' 하고 응석도 부려요."

서울 용산구에 있는 '도시속작은학교' 학생 전수진(18)양의 자랑이다. 이 학교는 한국청소년재단이 운영하고, 서울시 대안교육센터가 지원하는 도시형 대안학교다. 정규 중.고교를 그만둔 '탈(脫)학교생'들을 모아 가르친다. 현재 재학생은 모두 12명. 이들을 상근인 '길잡이 교사' 2명과 번갈아 들르는 자원교사 50여 명이 돌본다.

학사일정은 정규 중.고교에 비해 간단하다. 1학기는 똑같이 6개월. 그러나 4학기 졸업을 원칙으로 한다. 하루 일과는 오전 10시부터 낮 12시까지 1교시 수업, 점심식사 후 오후 1시30분부터 3시30분까지 2교시 수업이다. 수업시간에 정규 학교 과목들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 대신 장애인 인권문제에서부터 미술감상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을 배운다. 커리큘럼은 학생과 교사가 상의해 정한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아이들은 수업이 끝난 뒤 교사들이 1대1로 도와준다. '맞춤학습'이란 이름으로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따로 가르쳐 주는 시간도 있다. 요즘은 사진 촬영과 기타 연주, 그리고 프랑스어를 배우는 아이도 있다.

'특별한' 학교다 보니 재미있는 교칙도 많다. 흡연규칙이 대표적인 경우. 이 학교엔 흡연실이 있다. 아이들을 학교에 잡아두기 위한 고육지책. 대신 '한꺼번에 3명 이상이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 것' '어른들이 지나가면 담배를 숨기는 예의를 갖출 것' 등의 규칙을 정해놨다. 담배를 끊게 할 수 없다면 흡연 예절이라도 지키게 하겠다는 의도다. 이런 현실적인 교육 방법은 지난해 8명의 탈학교생을 사회로 돌려보내는 성과를 냈다. 졸업생 모두가 건실한 사회인이 됐고, 이 중 절반은 대학에 진학하기도 했다.

이 학교 황인국 대표는 "탈학교생은 거대 공교육의 피해자들"이라며 "이들에게 재교육의 기회를 주는 대안학교가 더 늘어나야 하고, 교육당국의 지원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국 중.고교에서 발생한 '중도 탈락자'는 지난해에만 무려 4만900여 명이다.

남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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