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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미를 추구하는 '영상시인' 〈초대〉의 윤석호PD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이승연 캐스팅 파문'으로 오는 10월 13일로 방영이 연기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KBS 미니시리즈 〈초대〉의 윤석호PD. 지난 85년에 KBS에 입사, 형식미를 추구하는 독특한 연출 스타일로 '영상시인'으로 불린다. 올해 나이 마흔넷의 노총각 PD인 그의 드라마 이야기를 들어봤다.

★ "시청자의 가슴으로 〈초대〉 못한 이승연…, 제 책임입니다"

윤석호 프로듀서를 인터뷰하기 위해 섭외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무척 난감해 했다. KBS 미니시리즈 〈초대〉의 방영예정이 8월 13일에서 10월 13일로 미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격랑 속에는 팬들의 인기조차 집행유예 당한 '이승연'이 자리잡고 있다.

"이 드라마를 기다리던 시청자들게게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해요. 어렵게 출연을 결정해주었다가 다시 도마에 오른 승연씨에게도 미안하고요. 승연씨의 복귀에 대한 앙케트도 하고 나름대로 준비를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연출자인 제 책임이죠."

사실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원래 미니시리즈는 드라마 PD들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제작을 맡는다. 원래 그의 차례는 11월쯤 돌아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내부 문제가 생겨 〈초대〉를 떠맡게 되었던 것. 그가 이 프로그램을 맡기 전, 고양이 목에 방울 매달기와 닮은 '이승연 캐스팅'은 이미 어느 정도는 결정된 사항.

지난 98년 방영된 〈웨딩드레스〉를 함께 작업한 인연으로 그가 최종적인 결정을 이끌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전적으로 그가 책임져야 할 문제는 아니라는 게 방송가 사람들의 귀띔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변명'을 끝내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섬세한 연출 스타일로 '영상시인'으로 별명이 붙은 윤PD가 건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첫발을 내디딘 곳은 광고 쪽이었다. 짧은 순간의 이미지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광고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조연출로 그가 제작했던 것 중에는 요즘 '노랑머리'로 인기를 얻고 있는 아역 탤런트 출신 이재은이 4세 때 출연한 코카콜라 CF가 있다.

★ 미니시리즈 주연으로 신인 기용,
이미지와 스타일을 중시하는 독특한 연출

"광고가 추구하는 것은 결국 상업성인데, 좀처럼 적응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다시 방송국에 들어오게 됐죠. 드라마 쪽을 하고 싶었는데 2년 정도 쇼프로그램의 조연출을 맡았어요. KBS는 다른 방송사보다 조연출의 기간이 긴 편이라 86년 말부터 93년까지 드라마 조연출을 맡았어요."

그의 연출 데뷔작은 드라마게임 〈인생은 도돌이표〉. 단막극이었는데 내용보다는 영상에 대한 칭찬이 쏟아졌다. 곧바로 주간극 〈내일은 사랑〉이라는 청춘드라마를 만들었다. 이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미니시리즈 〈느낌〉 〈프로포즈〉 〈순수〉 등을 내놓으면서 영상과 이미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자신만의 독특한 연출 스타일을 선보였다.

방송국의 윗사람들은 그가 미니시리즈를 맡을 때마다 불안해 한다. 시청률이 보장되는 스타급 연기자보다는 항상 위험부담이 큰 신인을 주연으로 고집했기 때문이다.

"저는 신인을 좋아해요. 대사 소화능력이나 연기가 다소 부족해도 만들어진 연기자의 느낌이 아니라 순수한 이미지를 그대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봐도 눈썰미가 있나봐요. 어렸을 때 식모나 종으로 나온 염복순이나 정윤희의 대성을 한눈에 직감했었는데 정말 그렇게 되더군요."

〈내일은 사랑〉에서는 다른 방송국의 대학생 리포터로 활약한 박소현을 캐스팅, 주변 사람을 놀라게 했다. 당연한 것이지만 연기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대사를 줄이고 그녀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쪽으로 치중했다. 박소현과 함께 출연한 오솔미 역시 '꽁지머리' 하나로 캐스팅된 케이스다.

드라마 〈느낌〉에 출연한 이본은 CF를 보며 발탁했고, 이지은은 아침 방송에 스치듯 지나간 패션쇼에 나온 모습을 보고, 제작 스태프를 닦달해 찾아낸 케이스. 〈사랑의 인사〉에 나온 배용준, 〈프로포즈〉의 원빈을 비롯해 요즘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류시원과 명세빈도 그의 손을 거쳤다.

"선배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연예인에게는 정을 주지 말라고요. 연예인은 항상 더 좋은 대우, 더 좋은 곳으로 옮겨가기 마련인데 정을 준 사람만 마음을 다친다는 뜻이에요. 저도 솔직하게 그 말에 동감은 하지만 쉽지 않아요. 원래 정이 많은 이유도 있지만 내 작품에 출연하는 연기자들을 저는 사랑하게 되거든요. 카메라 모니터를 보면서 '야, 정말 예쁘다'는 감탄사를 내뱉곤 하죠.

드라마를 함께 만들 때는 자주 연락을 하다가도 일단 드라마만 끝나면 얼굴조차 볼 수 없는 게 안타까워요. 그때마다 다음엔 '정 주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을 먹지만 또다시 사랑을 하게 되고…."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꼭 숫기 없는 소년 같은 느낌이 든다. 그의 말투도 유난히 차분하다. 이것은 촬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큰소리가 오고가기 마련인 촬영장에서도 그의 차분한 분위기는 그대로 나타난다. 큐사인도 조용할 뿐만 아니라 출연자에 대한 연기 주문도 항상 존대말이다.

그의 성격은 연출한 작품에 그대로 묻어 있다. 서정적인 분위기가 가득하다. 드라마의 내용 역시 '청승'에 가까운 지고지순한 사랑이 등장한다. 주로 '착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가끔 등장하는 '악한 사람' 역시 동정의 구석을 지니고 있다. '트렌디'에 익숙하고, 불륜이나 삼각관계, 극적인 반전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에겐 식상한 내용이지만 여전히 그의 드라마는 인기다. 주로 젊은이들의 사랑이 주된 내용이지만 성인층도 그의 드라마를 많이 본다.

"저는 형식미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이미지와 스타일도 중요하게 생각하죠. 우리 사회도 모든 것들이 기능적인 측면에만 초점이 맞춰진 듯한 느낌이 들어요. 드라마도 마찬가지고요. 당연히 영상매체라면 이미지나 스타일도 중요하다고 봐요. 그래서 이미지나 스타일을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편입니다."

솔직한 표현으로 '찍어내기 바쁜' 제작 여건 속에서 조금은 사치스런(?) 형식미를 추구하다보니, 스태프들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다. 석양을 화면에 담기 위해 하루 종일 기다리기도 하고, 주인공의 감정과 딱 맞는 카페를 찾기 위해 일주일을 꼬박 바친 적도 있다. 때문에 그가 만들어내는 드라마의 영상은 섬세한 장인의 손길이 느껴진다. 지난해 방영된 신TV문학관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이나 올해 초에 방영된 〈은비령〉은 기존 드라마에서 볼 수 없는 영상의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

그가 자신의 작품 중 맨 첫줄에 올려놓는 작품은 연작 미니시리즈라는 장르를 최초로 도입한 〈컬러〉다. 자유를 상징하는 블루, 열정을 상징하는 노란색, 성을 상징하는 핑크 등 '색'의 이미지가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연이은 드라마 성공에 힘입어 윗분들이 어렵게 허락해준 실험적인 작품이었어요. 4편까지는 괜찮았는데 바쁘게 제작해야 하는 방송 시스템으로 뒤로 갈수록 완성도 면에서 만족스럽지 못했어요."

그의 독특한 연출 스타일에 대한 비판도 있다. 시청률로 표현되는 시청자들의 반응은 뒤로한 채 혼자 만족을 느끼는 것은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비판을 윤PD도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하지만 결국 '스타일의 문제'라고 말한다.

"시청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드라마가 설 자리가 어디 있겠어요? 대중매체이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것을 만드는 게 연출자의 의무죠. 하지만 성격상 좀처럼 쉽지 않아요. 드라마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선과 악을 극명하게 대별시키는 콘트라스트를 주면 일단은 성공하는데, 그러고 싶지가 않아요.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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