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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그들’ 만의 인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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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정승윤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최근 언론에 ‘제주 4·3은 폭동, 광주 5·18은 민중 반란 진실위원회 이영조 위원장의 기막힌 역사 인식’이라는 제목의 보도가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일부 시민단체가 위원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사태 추이를 지켜보면서 우리나라에서 소위 ‘진보’라는 분들의 인권의식이 겨우 이 정도인지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위원장의 영어 논문에는 ‘제주도에서는 공산주의 세력이 주도한 폭동(rebellion)이 발생하여 여러 해 동안 지속되었다’는 취지로 사건의 발단을 언급했다. 그런 후 ‘공산주의 반란자들에 대한 동조 혐의를 받은 제주도민이 국가 권력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되었다’는 의미로 사건의 전개과정을 설명하고, ‘광주에서 발생한 민중 항쟁(revolt)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군부 강경파 그룹이 권위주의 정권을 수립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논문 어디에도 기사와 같은 내용이 없다. 그럼에도 마치 광우병 사건의 초기를 다시 보듯 선량한 시민들을 선동하려고 글을 왜곡했다. 이로 인해 위원장은 명예와 인권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지만, 소위 진보라는 분들은 자신들만이 인권을 옹호한다고 떠들고 있다.

 이런 식의 인권 침해 사례가 국가인권위 사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국가인권위 정책자문위원에서 사퇴한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김영혜 변호사의 상임위원 내정에 대해 전교조 명단을 공개한 조전혁 국회의원을 변호한 반인권 인사라고 비난하였다. 또 국가인권위 비상임위원에서 사퇴한 조국 서울대 교수는 홍진표 시대정신 이사의 상임위원 내정에 대해서도 ‘인권위를 북한인권위로 축소시키거나 아예 형해화시키는 임무를 맡은 X맨’이라고 비난하였다. 인권을 외치는 소위 진보라는 분들의 인권의식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변호인의 조력을 받은 권리는 그들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만이 누려야 되는 인권이고, 국가인권위는 그들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구여야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변호사의 인권 옹호 활동을 반인권적이라고 비난하고, 북한 인권 운동가의 내정을 인권유린위원회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인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고, 진보의 인권과 보수의 인권이 다르지 않다. 이러한 의미의 인권에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와 북한 지역에 사는 우리 동포들의 인권이 당연히 포함된다. 따라서 형사 피의자의 인권을 위해,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위해 묵묵히 일해 온 분들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비난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반인권적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내 눈의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의 티끌만 보듯이 이런 반인권적 인물들이 국가인권위의 비상임위원이고 정책자문위원이었으니 어찌 국가인권위가 평안하였겠는가. 진보라는 분들의 편협성은 행동의 옳고 그름을 중심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우리 편인지 아닌지를 중심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이런 사람들에게 북한 인권에 대해 한마디도 못하면서 인권의 탈을 쓰고 마치 인권 운동가인 것처럼 언제까지 편가르기 행동을 할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승윤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