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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徐當發落

‘천천히 결정하겠다’를 남발했던 광해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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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산대놀이는 조선시대에 성행했던 가면극의 일종이다. 세종대 이래 서울에 온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과정에서 산대도감을 두고 관장하다 민간에도 전파됐다. 송파 별산대놀이와 양주 별산대놀이는 그것의 한 갈래로 춤과 무언극, 덕담과 익살이 어우러진 민중 놀이였다.

1621년(광해군 13) 5월 15일, 종묘(宗廟)에서 철야 제사를 마치고 환궁하던 광해군은 수레를 멈추고 백성들의 산대놀이를 관람했다. 신료들은 ‘더운 날씨에 옥체가 상한다’며 속히 환궁하라고 권했지만 광해군은 듣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수레를 끌던 인부 한 사람이 쓰러져 바퀴에 치여 죽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사헌부는 ‘행사를 잘못 주관하여 사람이 죽었으니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촉구했다. 그러자 광해군은 “천천히 결정하겠다[徐當發落]”고 답했다.

 그런데 『광해군일기』에서 이 대목을 언급한 사평(史評)이 흥미롭다. “천천히 결정하겠다는 말은 나라를 망치는 것이다. 왕이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애초 우유부단한 데서 비롯되었지만 끝내는 간언을 거절하고 뇌물을 받아들이는 바탕이 되고 말았다… 놀이를 즐기는 일 때문에 사람이 죽었는데 관원을 처벌하라는 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마음을 잃은 것이 아니겠는가. 당시 한 창녀가 길을 가는데 한 소년이 웃으면서 약속을 청했다. 창녀는 대답하지 않고 지나치다가 소년이 재삼 청하자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임금의 말씀이 도리어 천한 창기들의 농담거리가 되었으니 또한 매우 슬픈 일이다”.

 광해군(1575~1641)에 대한 평가는 다면적이다. ‘동생(영창대군)을 죽이고 모후(인목대비)를 쫓아낸 패륜아’, ‘지나친 토목공사로 민심을 잃은 어리석은 군주’로부터 ‘임진왜란이 남긴 후유증을 극복하는 데 공을 세운 임금’, ‘명(明)과 청(淸)의 대결 사이에서 슬기로운 외교를 펼친 현군’까지 부정과 긍정이 교차한다. 광해군이 남긴 ‘빛’과 ‘그림자’ 가운데 어느 측면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그가 인조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쿠데타를 통해 폐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왜 쫓겨났을까?

 ‘서당발락’이 시정의 유행어가 된 현실을 꼬집은 사관의 지적 가운데 ‘간언을 거절했다’는 대목이 주목된다. 광해군은 경연(經筵)을 거의 열지 않았다. 경연은 왕과 신료들이 함께 모여 경전을 읽고 내용을 토론하는 자리다. 왕은 그 자리에서 통치와 관련된 과거의 사례를 배울 수 있고, 신료들은 평소 품고 있던 생각이나 시정의 여론을 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경연을 비롯한 신료들과의 대면을 귀찮아했다. 그러다 보니 신료들의 건의나 요청에 대해 ‘서당발락’으로 응대하는 일이 잦아졌다. 자연히 여론과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반정을 주도했던 세력들은 그런 약점을 파고들었다. ‘소통’을 위한 노력을 제대로 기울이지 않은 것. 바로 거기에서 광해군의 비극이 싹텄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