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생상품‘대박’ 환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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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호 29면

선물·옵션 등 파생상품 거래가 가장 활발한 거래소는? 경제·경영학을 공부하는 세계 각국 학생들 사이에 퀴즈로 심심찮게 등장하는 문제다. 미국 시카고상업거래소(CME)나 유럽파생상품거래소(EUREX)라는 답이 많이 나오지만, 정답은 한국거래소(KRX)다.

김광기의 시장 헤집기

세계선물산업협회(FIA) 통계를 보면 올 상반기 중 한국거래소의 파생상품 거래량은 17억8200만 계약. 전 세계 거래량의 16%나 돼 1위를 차지했다. 물론 국가 전체로는 미국(33%)이 최대 규모지만, 단일 거래소 기준으론 한국거래소가 으뜸이었다. 이런 결과는 폭발적인 옵션거래 덕분이다. 한국거래소의 올 상반기 KOSPI200옵션 거래량은 16억7000만 계약으로 전 세계의 주가지수 옵션 거래량 중 무려 68%를 차지했다.

국제결제은행(BIS)은 2005년 연차 보고서를 통해 한국거래소가 파생상품 거래에서 시카고상업거래소를 앞섰다고 발표했다. “이런 결과는 한국의 경제 규모나 주식 시가총액 등과 비교해 매우 놀라운 것”이라며. 한국거래소의 주식 시가총액의 세계 비중은 1.9%밖에 안 된다. 랭킹은 17위. 그런데 파생상품 거래는 세계 최대라니….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겁 없는 개인투자
자들 때문이다.

옵션거래는 ‘올 오어 낫싱’의 극한 게임이다. 주가지수 등 기초 자산의 가격이 일정 범위를 벗어날 경우 이익과 손실이 무한대 쪽으로 확장된다. 확률이 낮지만 한번 잘 걸리면 수백 배의 ‘대박’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금융 기본 지식도 없는 소액 투자자들까지 일확천금을 꿈꾸며 불나방처럼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한국 파생상품 시장의 개인 비중은 40% 안팎. 어느 나라를 봐도 유례 없이 높은 수준이다. 반대쪽에는 외국인과 국내 기관 투자가가 반반 정도인데, 최근 외국인 비중이 부쩍 올라가고 있다. 제로섬 게임이라고 하지만 정보와 거래기술이 떨어지는 개인의 승률은 당연히 낮다. 거꾸로 보면 이렇게 물 좋은 시장이 없다.

마음만 먹으면 가격 조작도 손쉽다. 파생상품의 기초 가격을 만드는 실물 주식시장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너무 작아서다. 지난 11일의 도이치증권발 외국인 매물 폭탄도 그런 혐의를 받기에 충분하다. 고작 1조6000억원으로 종합주가지수를 50포인트나 떨어뜨리며, 최고 500배의 옵션 대박을 쏟아 냈으니 말이다.

이번 사건 후 더 많은 개인이 몰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많은 이가 쪽박을 차고 빚더미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운 좋았던 일부의 대박 얘기만 요란한 탓이다. 파생상품 거래는 헤지(위험회피)와 투기적 거래가 적절히 균형을 이룰 때 순기능을 하며 발전한다. 한국의 선물거래는 그런 기능을 해내고 있다. 그러나 옵션거래는 다르다. 투기 일변도의 개인과 그들의 허점을 파고드는 투기적 외국인들의 노름판이다. 세계 옵션 거래량의 68%라는 대기록은 한국 금융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거래세를 새로 물리든 증거금을 대폭 올리든 뭔가 묘책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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