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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풍파랑 … 현정은의 승부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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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일러스트 = 박용석 기자]

‘승풍파랑(乘風破浪)’.

 현정은(55) 현대그룹 회장이 올해 신년사에서 밝힌 고사성어다. ‘바람을 타고 물결을 헤쳐 나간다’는 뜻이다. 중국 남북조시대 송나라 장수였던 종각(宗慤)이 위기 때마다 말보다는 행동을 앞세우며 난관을 헤쳐 나가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현 회장이 ‘승풍파랑’의 기세로 현대자동차그룹이란 파고를 헤치고 현대건설이란 대어를 낚았다. 현 회장은 2003년 취임 이후 고비 때마다 ‘말’보다는 ‘행동’을 앞세운 승부사 기질을 발휘했다.

 2003년 시삼촌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 측과 경영권 분쟁을 벌일 때다. 기자들의 쏟아지는 질문에도 입을 굳게 닫았다. 그런데 행동은 단호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국민주 운동’을 벌여 단번에 우호세력을 결집했다. 그러곤 현대그룹 경영권을 지켜냈다. 2005년 대북사업을 주도했던 김윤규 현대아산 부회장을 퇴출시킬 때도 그랬다. 바로 행동으로 김 부회장을 그룹에서 떠나게 했다.

 2008년 기업 인수합병(M&A)의 귀재로 불리는 하종선 전 현대해상화재보험 대표를 전략기획본부 사장으로, 올 3월 재계의 마당발로 통하는 장경작 전 롯데그룹 호텔부문 총괄사장을 현대아산 사장으로 영입하며 ‘행동’을 보여줄 수 있는 거물 인사를 끌어모았다.

 현 회장은 그룹의 경영권이 걸린 현대건설 인수전에선 ‘행동’뿐 아니라 ‘말’을 더했다. 인수전이 치열하게 이어지던 지난달 21일에는 취임 7주년을 맞아 전 임직원에게 e-메일을 보냈다. “7년간 한결같은 꿈을 꿔왔습니다. 혼자만의 꿈이 아니라 저보다 먼저 이 꿈을 꾸신 분들과,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이 함께 소망했던 꿈입니다. 이제 그 꿈까지 마지막 한 걸음이 남았습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광고전에도 적극 나섰다. 올 9월 추석 이후 여섯 가지의 신문 광고와 3편의 TV 광고를 내보냈다. 여성 경영자가 모델로 나오는 세 번째 TV 광고는 백미였다. 자연스레 현 회장을 연상시켰다. “현대건설, 현대그룹이 바르게 지키겠습니다.” 본입찰 마감일인 15일에도 ‘국민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특혜 의혹 없는 깨끗하고 공정한 평가를 기대합니다’라는 신문 광고를 24개 일간지에 냈다. 그러고는 우여곡절 끝에 16일 현대건설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이날 현 회장은 "현대그룹의 적통성을 세우고 옛 영광을 재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성명서를 냈다.

현대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하면 경영권을 무난히 지킬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그룹은 2003년 KCC그룹에 이어 2006년에는 현대중공업그룹이 현대상선 지분을 인수하면서 경영권이 위태로웠다. 현 회장은 현대엘리베이터와 우호지분을 합쳐 의결권이 있는 현대상선 보통주 약 30%를 보유하고 있다. 반면 현대중공업그룹과 KCC그룹은 26.3%를 보유 중이다. 현대건설은 현대상선 전체 주식 중 보통주 7.2%와 우선주 1.1%를 보유하고 있다. 만약 이 지분이 현대차그룹에 넘어가면 현대그룹의 경영권이 범현대가로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현대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하면 재계 21위(공정거래위원회 4월 기준, 공기업 제외)에서 단번에 14위로 뛰어오르게 된다. 물론 과제도 남아 있다. 인수전이 가열되면서 인수 금액이 5조원을 넘어선 게 큰 부담이다. 인수가격이 시장 예상가(4조원 안팎)보다 1조5000억원가량 높아졌다. 자칫 ‘승자의 저주’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현대건설과 현대그룹 계열사 간의 시너지를 창출하는 것도 당면 과제다.

강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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