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89) 장팅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장징궈(왼쪽)는 12세 때 모친(가운데) 곁을 떠났다. 15년 만에 러시아인 부인(오른쪽)과 아들을 데리고 고향을 찾았다. 1937년 가을 저장(浙江)성 펑화(奉化)현 시커우(溪口). 김명호 제공

1936년 가을, 소련 주재 중국대사 내정자 장팅푸(蔣廷<9EFB>)는 퍼스트 레이디 쑹메이링의 호출을 받았다. “위원장은 장징궈의 귀국을 학수고대한다.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소련에 가거든 소재를 파악하고 귀국시킬 방법을 찾아봐라. 위원장의 유일한 혈육이다.” 소련 측과 협의해 장징궈를 귀국시키라는 지상명령이나 다름없었다.

모스크바에 부임한 장팅푸는 소련 외교부 차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장징궈의 문제를 거론했다. 외교부 차장은 “장 위원장의 아들이 소련에 있다는 말을 처음 듣는다”며 능청을 떨었다. 다시 만났을 때는 정중하게 난색을 표했다. 장제스가 국·공합작을 수락하기 몇 달 전의 일이었다.

1937년 3월 23일 늦은 밤, 남루한 노동자 복장을 한 중국인이 중국대사관을 찾아왔다. 이름과 용건을 물어도 대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할 수 없다며 자리를 뜨지 않았다. 관원들과 한담을 나누던 장팅푸는 보고를 받자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정문 쪽으로 냅다 달려 나갔다.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스탈린에게 귀국을 권고받은 장징궈는 부친의 심중을 헤아릴 필요가 있었다. 장팅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가 나의 귀국을 희망하리라고 생각합니까?” 장팅푸의 입에서 “위원장은 귀국을 갈망한다. 내가 확신한다”는 말이 나오자 장징궈는 “여권과 귀국할 차비가 없다. 러시아 여자와 결혼해 아들이 하나 있다. 귀국할 때 입을 옷도 변변한 게 없다”며 고민을 털어 놨다. 장팅푸는 어이가 없었다. “우리가 모두 준비하겠다. 위원장은 며느리의 국적 따위를 따질 분이 아니다. 손자를 보면 얼마나 기뻐하시겠나.”

장징궈는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대사관을 떠났다. 장팅푸는 대사관에 머물라며 붙잡고 싶었지만 말을 해도 들을 사람 같지가 않았다.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자살이라도 할 각오를 했다.

장팅푸의 급전을 받은 장제스는 “제 발로 대사관을 찾아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한 달 후면 상하이에 도착한다니 마음이 놓인다. 기쁨을 주체하기 힘들다”는 일기를 남겼다.

3월 25일 장징궈는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귀국길에 올랐다. 모처럼 일기를 썼다. “15세의 치기(稚氣) 어린 소년에서 27세의 청년이 되기까지 학교와 군대, 공장, 농촌을 오가며 온갖 애정과 증오를 경험하고 체험했다. 멀리 보이는 크렘린은 처음 보았을 때와 다름없다. 오후 2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추억의 모스크바를 떠났다.”

장징궈의 귀국이 확실해지자 장제스는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자식의 교육에 신중하지 못해 내 스스로 가풍을 무너뜨렸다. 비통하고 슬프다”고 일기에 적었다. 장징궈도 마찬가지였다. 멀리 상하이가 보이자 배에서 내리는 즉시 감옥으로 끌려갈까 봐 겁이 났다. 아버지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소련에서 아버지에게 퍼부었던 말들은 되씹어 보니 내가 아버지라도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이왕 하던 고생, 그냥 소련에 눌러 있을걸 괜히 왔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장제스는 장징궈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한동안 만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소련에서 자신에게 퍼부어 댄 말들을 생각하면 그 입에서 또 무슨 엉뚱한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불안했다. 좌파 인사들과 접촉을 금지시키고 관찰에 관찰을 거듭하라고 지시했다. 그래도 어찌나 보고 싶었던지 일기에는 참을 ‘忍’(인)자만 계속 써댔다.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 장징궈는 국민당 조직부장 천리푸(陳立夫)를 찾아가 하소연했다. 천은 “너는 아직 공산당원이다. 네가 아버지에게 한 일을 생각해 봐라. 좋은 방법이 있다. 이제는 공산당원이 아니라는 편지를 아버지 앞으로 써라. 내가 전달하겠다.” 장징궈는 “부자간에 무슨 수속이 이렇게 복잡하냐”며 호통을 쳤다.

장제스는 국민당 원로 우쯔후이(吳稚暉)와 심복 천푸레이(陳布雷) 등으로부터 “천륜의 즐거움을 거역하지 말라”는 권고를 받고서야 못 이기는 체하며 장징궈를 만났다.
12년 만에 아버지를 만난 장징궈는 무릎을 꿇은 채 세 번 절했다. 장씨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법도였다. 쑹메이링에게도 같은 예를 취하며 “어머니”라고 불렀다.

부자간의 첫 대화는 간단했다. “앞으로 뭘 할 생각이냐?” “정치나 공업 중에서 하나를 택하겠습니다.” “그건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선 고향에 가라. 네 엄마를 잘 모셔라.”

장징궈는 고향으로 떠나는 날 쑹메이링을 찾아가 다시 절을 했다. 만족한 쑹은 형부에게 꿔온 거금 10만원을 절값으로 건넸다. 장제스는 그제야 안도했다. (계속)

김명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