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김영진, 0jean76@hanmail.net
이것은, 아마도 살인에 관한 긴 보고서가 될 것이다. 가령, 언젠가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날는지도 모른다. ‘살해된 남자의 두개골은 U자 형으로 함몰되어 있었다. 마치 말굽으로 강력하게 내려친 것처럼.’ 아니 두개골만 사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죽은 남자는 가슴에 말발굽이 강력한 힘으로 밟고 지난 듯 말굽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으며, 그 자국을 남긴 어떤 힘은 갈빗대들을 단번에 부러뜨리고 심장을 압박해 파열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같은 기사가 게재될 수도 있다. 배를 밟으면 뱃가죽에 찍힌 말굽 자국이 창자까지 박혀들어 등 쪽에 양각(陽刻)으로 말굽이 드러날 것이고 허벅지를 밟으면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가 대퇴부의 뼈에 선연히 음각(陰刻)으로 새겨진 말굽을 보게 될 것이다. 물론 말이나, 혹은 말을 탄 누가, 죽은 자의 가슴을 밟고 지나간 것은 아니다. 말은 예민하고 순발력이 뛰어난 동물이다. 시멘트 콘크리트로 도배되다시피 한 이 도시에서 도대체 어떤 말이, 혹은 말 탄 누가, 그토록 정교하게 사람의 가슴에 말굽 자국을 낼 수 있겠는가. 더구나 목격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말굽 소리는 고사하고 비명 소리 같은 것을 들었다는 사람조차 없다. 그렇다면, 살해된 사람의 두개골이나 가슴에 남은 말굽 자국은 말굽 같은 형태의 흉기일 뿐 말굽이 아닐 확률이 높다. 말굽을 교묘하게 조작해 살인의 도구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 말굽과 관련된 원한을 갖고 있거나 말굽에 대한 깊은 트라우마를 지닌 미치광이 사이코패스가 범인일 가능성이 많다. 센스 있는 상상력이고 합리적인 추리이다. 수사관들은 경마장, 승마장이나 마사회 따위를 뒤질 것이고, 이 엽기적 살인사건의 전말에 비상한 흥미를 느낀 상식적 합리주의 신봉자들은 당연히 빙고, 라고 말하면서 손뼉을 칠 테지. 나도 빙고, 하면서 웃을 터이다. 왜냐하면 살인자는 평생 단 한 번도 말과 인연을 맺어본 적이 없고 말과 관계가 깊은 사람을 만나본 일도 없으며 경마장이나 승마장 같은 데를 가본 기억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살인자는 가까이에서 말의 눈빛을 들여다본 경험조차 전무한 위인이다. 말띠도 아니다. 떠돌이 노숙자로 지내던 언젠가, 남해의 어느 도시를 지나던 중 혹시 얻어먹을 거리라도 있을까 해서 작은 화랑에 들렀다가 뛰고 달리는 말의 그림들을 본 기억은 있다. 아주 역동적인 말과 말떼만을 그린 화가는 정작 너무 작고 마른 데다 비루한 인상이어서 혼자 쿡쿡거리고 웃었던 기억이 상기도 생생하다. 이럴진대, 이 엽기적인 살인사건을 두고 경마장 승마장 심지어 마사회 같은 단체나 열심히 쑤시고 다닐 수사관이나, 박수 치면서 헛다리짚는 수사관들을 응원할 수많은 사람들의 뻔한 상상력을 먼 데서 유유자적, 보면서 내 어찌 빙고, 하고 웃지 않겠는가. 성급히 고백하자면 이렇다. 언제부터인가 내 손바닥 얇은 피부 안쪽에 말굽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지문이 다 닳아 없어지고 굳은살이 마치 자갈처럼 단단해진다고 하더라도 손바닥에 말굽이 생겼다는 말은 동서고금 들은 일이 없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내 손바닥에 정말 말굽이 생겨난 것이다. 성급히 고백하자면 이렇다. 언제부터인가 내 손바닥 얇은 피부 안쪽에 말굽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게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나무나 기둥, 벽돌이나 콘크리트 벽, 바위, 철판, 암튼 단단한 것만 보면 손바닥으로 때리는 버릇을 갖고 있다. 오래된 버릇이다. 그 못된 버릇 때문에 손바닥이 내가 산 날보다 더 많이 터지고 살아갈 날보다 더 많이 찢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손바닥에서 자갈 구르는 소리가 난다’는 속담이 있다. 노동을 많이 해 굳은살이 박여 마치 돌처럼 손바닥이 단단해지는 것을 두고 한 과장법의 속담이다. 그러나 지문이 다 닳아 없어지고 굳은살이 마치 자갈처럼 단단해진다고 하더라도 손바닥에 말굽이 생겼다는 말은 동서고금 들은 일이 없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내 손바닥에 정말 말굽이 생겨난 것이다. 남에게는 물론이고 평소엔 내게도 보이지 않는다. 손바닥을 들여다보면 손금이 아주 희미해졌다는 것만이 남과 다르다면 다르다. 말굽은 날로 더 단단해져서 이제 쇠판을 내려치면 쇠가 갈라질 정도이다. 말굽이 더 단단해지는 것에 비례해 손금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좀 아쉽다. 말굽이 쇠의 강도를 훨씬 넘어 다이아몬드만큼 단단해지면 생명선조차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생명선이 없어지면 죽는 걸까, 아니면 영원히 사는 걸까. 손바닥에 말굽을 숨겨 지니고 영원히 사는 것은, 아무래도 슬픈 느낌이다. 소설가 박범신씨 인터뷰 보기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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