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일까요] 책 많이 읽는다고 글 잘 쓰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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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다. 명문장가(名文章家)조차 ‘글 쓰는 일이 쉽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독서 경험이 적은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책을 많이 읽어야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얘기에 더욱 움츠러든다. 글을 잘 쓰려면 정말 책을 많이 읽어야 할까.

글=박정현 기자 lena@joongnag.co.kr
사진=황정옥 기자

책·경험, 글 쓰는 ‘밑천’ 만들어

글을 잘 쓰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할까? 다독·다작·다상량이 글 잘 쓰는 비결이다. [황정옥 기자]

중앙일보 열려라 공부팀은 동국대·서울예대·중앙대 문예창작과 학생 215명을 대상으로 ‘독서와 글쓰기’의 관계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다. 응답자 중 절반 이상(119명·55%)이 ‘독서를 많이 해야 글쓰기를 잘 할 수 있다’고 답했다. △직접 경험할수 없는 것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어 견문이 넓어진다 △밑천이 있어야 장사를 할 수 있다 △책을 읽지 않으면 표현력고 어휘력 등에 한계가 있다 등의 의견이었다. 또 독서가 문장력(98명·31%), 표현력(73명·23%), 어휘력(56명·17%)에 도움이 된다고도 응답했다.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배우고 있는 이들은 독서를 많이 한다. 서울예대 채호기(문예창작과) 교수는 “우리 학과는 면접에서 독서 수준을 평가한다”고 말했다. 수업 중에도 책 읽기 과제가 많다. 문예창작과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글 잘 쓰는 방법’은 송나라 문인 구양수가 말한 ‘삼다(三多)’다. 다독(많이 읽음)·다작(많이 씀)·다상량(많이 생각함)이 최고의 비결이라는 것이다.

‘많이 읽기’보다 ‘어떻게 읽느냐’ 중요

그러나 응답자의 45%(96명)는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모두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아니다’고 대답했다. 1967년 일본에서 스물셋의 나이로 최연소 아쿠타가와상(일본의 권위 있는 순수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를 사례로 제시했다. 그는 소설가가 되기 전 허먼 멜빌의 『백경』이 유일하게 읽은 소설책이었지만 그 한 권으로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배웠다고 했다. 한 응답자는 “책을 많이 읽지 않고도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책을 체화하는 능력이 있어서”라며 “그런 재능이 있기는 어려우니 책을 많이 읽는 수밖에 없다”고 의견을 냈다.

 독서만이 글쓰기의 능사가 아니라는 대답을 한 학생들도 많았다. ‘여행 등 직접 경험을 함으로써 배울 수 있는 게 많다’는 것이 이유다. 문창과 학생들은 글쓰기의 소재와 주제를 얻는 데 ‘경험(133명·41%)’이 가장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글을 잘 쓰고 싶어 하는 초·중·고 후배들에게 책(138명·45%)과 경험(112명·37%)을 많이 할 것을 당부했다. 응답자 대부분은 ‘독서와 글쓰기의 관계가 충분조건이지 필요조건’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책을 안 읽는 사람은 글을 잘 쓰기 어렵고,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독서와 글쓰기는 ‘동전의 양면’

한국독서교육개발원 남미영 원장은 “책만 많이 읽는다고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지만 전혀 안 읽는 사람보다는 낫다”고 말했다. 책을 안 읽어도 글을 잘 쓰는 사람이 한두 명 있다고 해서 이를 일반화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글을 쓸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면 그것은 ‘거리’가 부족해서다. 그 거리는 경험·지식 등 배경지식에서 나오는데 이것이 가장 풍부하게 담겨 있는 게 책이라는 것. 남 원장은 “책에서 얻는 거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며 “글쓰기 연습만 하는 것은 입력도 안 된 상태에서 출력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채 교수는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의 생각을 풀어내는 것도 있지만 언어를 매만지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풀이했다. 그는 “무언가와 친해지려면 매만져야 하듯 언어와 친숙해지려면 독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독서와 글쓰기는 다른 것 같지만 동전의 양면과 같아 함께 가야 한다는 설명이다. 채 교수는 “책을 보며 생각하는 독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감성적이거나 서정적인 글을 쓸 때 독서 경험이 중요할까. 서울대 우한용(국어교육과) 교수는 여행 글을 예로 들었다. 여행지 풍경을 설명할 때는 많은 독서가 필요하지 않지만 여행지와 연관된 문화나 역사를 풀어낼 때는 독서 경험이 있어야 훨씬 실감나게 쓸 수 있다. 우 교수는 “박지원이나 정약용의 글처럼 잘 썼다고 평가받는 글은 인용이 많다”며 “풍부한 독서 경험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독서 경험이 없어 글쓰기가 망설여진다면 “독서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우 교수의 말에서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는 “문학작품을 읽지 않았어도 우리 교과 과정이 책 읽는 것과 같아 글을 쓰겠다고 작정만 하면 이 독서 경험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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