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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네오 재패네스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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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메이드 인(Made in)은 뒤에 나라 이름을 붙여 제품의 생산지를 나타내는 영어다.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라 썼다면 중국에서 만든 물건을 가리킨다. 너무 널리 쓰여 영어라기보다는 글로벌리시(Globalish) 또는 글로비시(Globish)의 원조 가운데 하나라 볼 수도 있다. 인터넷이나 지역에서 변화한 형태로 쓰이는 지구촌 영어를 가리키는 글로벌리시는 가지가지로 뻗어간다. 오죽하면 코미디 소재로까지 등장했을까. 한 개그 프로그램이 메이드 인을 '마데 인'으로 읽어 '마데 전자'를 탄생시킨 걸 보면 영어의 끝이 글로벌리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메이드 인의 우리 식 표현은 제(製)나 산(産)이다.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는 미제(美製)요, 메이드 인 재팬은 일산(日産)이거나 일제(日製)다. 한국전쟁 이후 어지간히 어렵고 없던 시절 한국인에게 미제와 일제는 최고 품질을 지닌 명품의 대명사였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미제 물건을 팔러 다니는 보따리 장수가 부자 동네를 돌았다. 서울 남대문에는 탱크와 미사일 빼고는 다 구해준다는 도깨비 시장이 지금까지 이름값을 한다. 국산을 깔보고 외제라면 사족을 못 쓰는 묘한 풍조는 아직도 한국사회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메이드 인 코리아가 미제.일제를 어지간히 따라잡았는가 싶었는데 옆집 일본이 앞질러 나가는 소리를 낸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새로운 국가 상표로 '네오 재패네스크(Neo Japanesque.신 일본 양식)'를 들고 나온 것이다. 앞으로 3년에 걸쳐 메이드 인 재팬을 대신할 새 브랜드로 네오 재패네스크를 키우겠다는 일본의 목소리는 때가 때인 만큼 예사롭지 않다. 네오 재패네스크를 이끌 대표 기업인 도요타자동차가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를 제치고 2007년 세계 자동차업계 정상에 서겠다는 뜻을 밝힌 것은 한 예일 뿐이다. 미국식 꼬리표인 메이드 인을 버리고 독자적인 새 일본풍 제품으로 세상을 휘어잡겠다는 경제 대국의 다짐은 정치 대국을 향한 속내를 엿보게 한다.

1964년 도쿄(東京) 올림픽의 상징과 포스터를 만든 디자이너 가메쿠라 유사쿠(龜倉雄策.1915~97)는 "일본인에게는 모방으로 시작해 일본적인 것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고 했다. 메이드 인 재팬에서 네오 재패네스크로 가는 일본을 보면 메이드 인 코리아가 갈 길은 어디멘가 절로 사념에 빠지게 된다.

정재숙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