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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은 클래식 아닌 대중가요, 입지 못할 옷은 만들지 않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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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호 02면

1 서울 청담동 사옥 지하 1층 홀에서 포즈를 취했다. 패션쇼에 쓰일 신발도 다 그가 만들었다. 2 2007년 KBS 백남준 추모 패션 퍼포먼스의 한 장면.3, 4 28일 서울 대치동 SETEC에서 열리는 서울패션위크 피날레 무대에 선보일 2011 봄·여름 컬렉션.

21일 오후 서울 청담동 ‘미스지컬렉션(Miss Gee Collection)’을 찾았다. 제법 널찍한 앞마당에 초록색 잔디가 얌전히 깔린 암녹색 5층 건물. 디자이너 지춘희씨는 직원들과 회의 중이었다. 올해 10주년을 맞은 서울패션위크(22~28일 대치동 SETEC 등)에서 피날레 무대(28일 오후 6시30분)를 맡은 그다. 2000년 10월 시작된 ‘서울컬렉션’(서울패션위크의 전신)의 첫 패션쇼는 그의 옷들로 시작됐다. 지금까지 20번 열린 춘·추계 서울패션위크에서 그의 무대는 항상 가장 밝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왔다.
“오전에 (모델들이 옷을 입어보는) 피팅 리허설을 마쳤어요. 25일 저녁에 무대 리허설이 있고요. 뭐, 이제 제 손을 떠났죠.”

10회 서울패션위크 피날레 무대 장식하는 디자이너 지춘희

흰색 자작나무 행거에 이번에 준비한 2011 봄·여름 컬렉션 두 벌이 걸려 있었다. 하늘하늘 오간자에 레몬 빛 꽃무늬를 수놓은 원피스. 맑은 옥색 코튼 원피스엔 작고 동그란 투명 비닐이 빼곡히 박혀 있어 반짝이 효과를 낸다. “요즘 생활이 좀 지루하지 않나요. 반짝이고픈 욕구를 풀어드리고 싶었어요.” 그의 옷은 여성적이다. 색과 스타일이 곱다. 특히 트임이 있으면서 곡선미를 살려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여성의 몸에 대한 관심이 많다. 어디를 어떻게 만들어야 예뻐 보일지 항상 고민한다”는 그다. 그는 말한다. “컬렉션을 보면서 ‘이건 갖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뺏어야죠. 그게 디자이너의 존재 이유입니다.”

-옷이란 무엇입니까.
“입을 수 있는 것이죠. ‘나라면 이걸 돈 주고 사 입을까’ 생각하면서 옷을 만듭니다.”

-안 입을 옷을 사는 사람도 있나요.
“그게 여자예요. 허영 같은 거죠. 여자들은 누구나 속에 드라마가 있어요. 그런 것에 대한 충족도 필요합니다. 꼭 실생활용만 필요한 건 아니거든요. 여자의 마음을 잘 알아야 해요.”

-어떻게 알죠.
“변화에 대한 욕구, 사회적 변화 등을 종합적으로 봐야죠. 사실 패션쇼라는 게 세상을 1년 앞선 것이거든요. 시즌보다 6개월 전에 쇼를 하고, 그 쇼를 준비하기 위해선 그 6개월 전부터 구상하고 원단을 주문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회를 앞서가기 위해 저는 신문을 읽습니다. 아침마다 종합지 3개, 경제지 1개, 스포츠지 1개를 꼼꼼히 읽으며 사회현상을 파악합니다. 경제 전망을 하지 않고 옷을 만들 순 없죠. 일요일 아침엔 중앙SUNDAY를 재밌게 봅니다.”

-작품에 대한 영감은 어떻게 얻나요.
“디자이너는 1년에 두 차례 컬렉션을 합니다. 의무이자 숙제죠. 6개월을 어떻게 살았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스키장에서 신나는 경험이 있었으면 옷에 얼음 조각 느낌이 실리기도 하고요. 전시회를 갔다가 특정 그림에 꽂히면 그 느낌을 살리기도 하고. 주로 자연에서 많이 얻죠.”

-시골에서 사셨나요.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충주에서 중학교 때까지 살았어요. 제 정신적 고향이죠. 근교에 과수원과 너른 들판이 있었는데 자연의 색이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어요. 자연이 가르쳐준 선과 색감에 대한 감각을 지금까지 빼먹으며 살고 있는 거죠.”

-왜 의상디자이너가 됐나요.
“좋아하니까 하겠죠? 만드는 일을 좋아했어요. 요리나 집 꾸미기도 잘해요. 신발이나 백, 소파도 만드는데요.”

-그런 것까지?
“그래도 옷이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디테일이 복잡하고 재료도 많이 들어가거든요. 게다가 꿈과 감성과 현실이 한 박자로 맞아떨어져야 하니까.”

-언제 디자이너가 될 생각을 했습니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네요. 옷 만드는 게 일상이었죠. 1976년 명동에 조그맣게 ‘지 의상실’을 냈는데, 20대 초반에 그렇게 낸 것은 아마 유일무이할 거예요. 80년 서울 조선호텔에서 ‘미스지 컬렉션’이란 이름으로 패션쇼를 하면서 브랜드를 론칭했습니다. 89년에 지금의 청담동 건물을 지었죠.”

-상당히 빨랐네요.
“시대적으로 운대가 맞았다고나 할까. 세상물정 잘 모르고 ‘무대포’ 정신으로 한 거죠. 하하. 그런데 잘 팔리더라고요. 처음엔 사보이호텔 앞 ‘준’이나 ‘필 하모니’ 같은 매장 사이에 있었는데 당시 명동은 유행의 거리였으니까.”

-그렇게 벌써 30년입니다. 도와주는 분이 많았나 보죠.
“마음에 맞는 분들과 일하는 스타일이에요.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사람들과 모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서로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다 보면 종종 새로운 영감을 얻곤 하죠.”

사실 지춘희 컬렉션은 연예인들이 좋아하는 옷으로도 유명하다. 99년 드라마 ‘청춘의 덫’에서 심은하가 입고 나온 그의 옷은 ‘청담동 며느리룩’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장미희·이미숙·이영애·고현정·전도연·송윤아 등 내로라하는 당대 톱스타들이 그의 옷을 즐긴다. 93년 대종상 영화제에서는 영화 ‘그대 안의 블루’로 의상상을 받았다. 2005년 드라마 ‘패션 70s’은 그의 의상과 자문으로 만들어졌다. 2005년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무대 옷을 만들기도 했고 2007년엔 드라마 ‘궁S’에도 간여했다.

-패션쇼가 열리면 연예인 사단이 뜬다고 하는데.
“무슨 특별한 연예인 마케팅을 하는 줄 아는데 그런 거 없어요. 내가 그렇게 적극적인 성격도 아니고. 일하다 서로 마음이 맞게 되고, 또 이래저래 만나게 되고, 그래서 친해지고, 그렇게 된 거죠.”

-영화나 드라마의 의상 컨셉트에도 도움을 준다면서요.
“최근엔 그런 적이 별로 없어요. 요새는 사람들이 거저 받는데 너무 익숙한 것 같아. 돈으로 움직이는 거죠. 저는 좋아하는 감독들하고는 기꺼이 작업하지만 협찬 같은 것은 하지 않아요. 마음에 맞고 제 이미지와 맞으면 할 뿐이죠. 게다가 우리나라는 전문가의 능력에 대해 인색해요. 외국 디자이너에게는 돈을 턱턱 주면서 국내 디자이너에게는 그렇지 않죠. 저는 그 가치에 대해 제대로 지불하는 곳하고만 일합니다.”

-열성 팬인 연예인은 누가 있나요.
“아이, 그런 말하면 빠진 사람들이 서운해해서. 최근엔 가수 아이유(93년생)가 옷을 사갔죠.”

-‘입는 옷을 만든다’고 했는데, 실험적인 의상은 안 만드나요.
“자제해요. 입지 못하는 옷은 필요 없죠. 그래서 ‘작품’이란 말도 싫어해요. 옷은 옷이죠. 클래식이 아닌 대중가요예요. 사람들이 자주 흥얼거려야 해요. 물론 클래식도 많이 들어야 하지만.”

-옷을 사 입지는 않나요.
“저도 사 입었으면 좋겠어요. 남의 가게에 못 들어가요. (입고 있는)이 청바지도 제가 만든 거예요.”

-패션쇼를 위해 어느 정도 준비하나요.
“외국 쇼는 보통 50~60벌이 나오죠. 제 쇼에는 70~80벌 정도. 원래는 한 100벌 정도 만드는데 이 중 추려내 무대에 올립니다. 그게 6개월 뒤 매장으로 나오죠.”

-준비에 스트레스가 많겠습니다.
“쇼가 끝나면 일단 혼자서 자아비판을 합니다. 칭찬 속에 갇히면 안 되거든요. 어디쯤 있는지 내가 제일 잘 알아야 하니까. 그리고 다 잊습니다. 미련은 남기지 않습니다. 다음 쇼를 준비할 뿐이죠. 이것도 흥행인지라 감을 잃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쇼가 끝나면 여행을 즐긴다고 했는데 쉬는 쪽인가요, 노는 쪽인가요.
“일하러 간 건 아닌데 갔다 오면 일을 시작하게 되는 그런 여행을 좋아해요.”

-좋아하거나 영향을 준 디자이너는.
“디자이너계에도 주류가 있고 아류가 있어요. 저는 외국에 나가면 둘 다 봅니다. 그러면서 ‘난 왜 이걸 놓쳤을까’ 아쉬워하기도 하고, ‘뭐 이거밖에 안 되니’ 하며 어깨를 으쓱이기도 하고, 왔다갔다 해요.”

-정상에 올라보니 어떤가요.
“늘 누군가 내 옷을 좋아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일합니다. 가끔 안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이 들 때도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하세요.
“그냥 일해요.”

-외롭진 않은가요.
“누구나 다 외로운 거 아닌가요.”

-‘미스지컬렉션’은 97년 갤러리아 명품관에 입점했습니다.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로는 처음인데요.
“하하. 지금까지 버티고 있어요. 외국 명품 기업들이 오죽 장사를 잘 하나요. 우리도 디자이너 경쟁력을 더 키워야 해요.”

-외국 명품 브랜드와 우리 브랜드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일단 그네들 옷이잖아요. 그만큼 역사가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도 경제가 성장한 만큼 옷도 성장했죠. 많이 좁혀졌어요.”

-서울컬렉션으로 시작된 서울패션위크도 벌써 10년입니다.
“컬렉션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그 나라 경제와 문화 수준이 어느 정도 이르렀다는 증거거든요. 컬렉션이 열리는 도시를 따져보세요. 이걸 문화적 힘으로 연결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지금까지도 패션 하면 사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사실은 문화고 생활인데. 요즘 한국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패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맛과 멋을 함께 알릴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죠. 스타 디자이너도 만들어 패션계에 힘을 실어줘야 합니다. 패션쇼도 지금은 학여울 전시장에서 하지만 앞으로 남산에서도 하고, 고궁에서도 하면 어때요.”

-쇼가 더욱 대중화돼야 한다는 뜻인가요.
“네. 음악회는 보러 가면서 패션쇼는 왜 보러 가지 않죠? 특히 40~50대 남성이 많이 보아야 합니다. 새로운 것, 좋은 것을 보면 눈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집니다. 다들 이름을 알 만한 기업 회장님도 제가 초청했더니 '머리가 확 깨는 느낌'이었다며 고마워하시더라고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예쁜 옷, 멋진 옷, 편한 옷 중에서 뭘 고르겠느냐”는 우문을 던졌다. “누굴 만날 땐 예쁜 옷, 일할 땐 멋진 옷, 집에서 있을 땐 편안한 옷”이라는 현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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