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만 드립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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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호 10면

예전엔 책 선물을 참 많이 했다. 크리스마스나 설 같은 날은 물론, 친구나 동료 생일에 책을 선물하는 일이 흔했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도 오래 아껴 읽고 싶은 책을 만나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한 권 더 샀다. 그럴 때면 그냥 책만 주는 게 아니라 정성껏 헌사를 적어 선물했다. 책 선물을 주고받는 기쁨도 컸지만 헌사를 만나는 즐거움도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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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사는 책에서 읽은 문장을 인용하거나 마음에 담아둔 말을 적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쓴 헌사는 못나고 모자랐다. 반면 선물 받은 책에 적혀 있던 헌사들은 아름다웠다. 가령 고등학교 때 좋아하는 선배로부터 받은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에 적힌 “네게 간섭만 하고 싶은 형이”라는 헌사는 얼마나 오랫동안 내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또 어느 시인에게서 받은 이수명의 시집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에는 이런 헌사가 적혀 있었다. “고양이 좋아하세요? 전 고양이의 환상을 좋아하지요. 고양이보다 고양이 같은, 무엇. 사랑보다 사랑 같은, 무엇. 이 선물이 님의 고양이 같은 무엇을 불러오길, 바랍니다.” 시인이 말한 ‘고양이 같은, 무엇’이 무엇인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그 헌사는 내 마음을 한껏 고양시켰다.

요즘은 책을 선물하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헌사를 받는 경우는 더 드물다. 이제 헌사는 저자로부터 책을 받을 때나 겨우 만날 수 있는 ‘고양이 같은, 무엇’이다. 내가 저자로부터 받은 헌사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이렇다. “이 책은 선생님에게 받은 메일이 씨앗이 되었습니다. 부디 받아 보관해 주세요.” 이런 헌사도 가슴을 친다. “이 책을 선생님께 가장 먼저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부끄럽지만 나도 몇 권의 책을 냈다. 내가 주로 쓴 헌사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감사한 마음으로 드립니다”라는 문장이다. 볼품없는 헌사다. 헌사라면 역시 버나드 쇼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쇼는 헌책방에서 자신의 책을 발견한다. 참담한 기분으로 책장을 펼쳤는데 거기 이런 헌사가 적혀 있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지 버나드 쇼가.” 쇼는 그 책을 사서 다시 그 사람에게 보낸다. 헌사에 약간의 글자를 덧붙여서. “새삼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지 버나드 쇼가.”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에 들어 있는 지젝의 헌사도 재미있다. 1990년대 초 지젝의 미국인 친구가 루마니아에 유학 갔다. 친구는 일주일쯤 지난 후 미국에 있는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 “루마니아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다정하고 유쾌하고 배우려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전화를 끊자마자 루마니아의 비밀경찰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자신은 통화를 엿듣는 것이 임무인 요원인데 루마니아에 대해 좋게 말해준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면서 즐거운 유학생활이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이 일화를 소개한 다음 지젝은 다음과 같은 헌사를 붙인다. “이 책을 그 익명의 루마니아 비밀경찰 요원에게 헌정한다.”

얼마 전 동료가 회사를 그만두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그의 책상 서랍에는 그가 두고 간 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 물론 그 책은 내가 쓴 책이고, 책의 면지에는 낯익은 필체로 쓰인 헌사가 쓸쓸하게 웃고 있었다. 버나드 쇼처럼 나는 헌사를 고쳐서 그에게 책을 다시 보냈다.
“부끄러움만 드립니다.”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대한민국 유부남헌장』과 『남편생태보고서』책을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스스로 우유부단하고 뒤끝 있는 성격이라 평한다. 웃음도 눈물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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