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호주제 폐지에 앞장선 남성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여성계의 숙원이었던 호주제 폐지 법안(민법 개정안)이 지난 2일 국회를 통과하기까지에는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여성계를 지원한 남성들이 있다.

부자지간인 김주수(76.경희대 법대 객원).김상용(41.부산대 법대) 교수는 대를 이어 가며 호주제 폐지의 당위성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한 학자들이다.

아버지 김 교수는 호주제 폐지를 처음 제기한 민법 학계의 거두. 1957년 호주제 폐지를 주장하는 논문을 처음 발표한 이후 이태영 박사 등 여성계 인사와 함께 반세기 동안 민법 개정에 힘을 쏟아 왔다.

이번에 통과된 민법 개정안의 핵심 내용인 호주제 폐지, 친양자제, 동성동본 금혼 폐지 등을 가장 오랫동안 다듬어 온 것도 김 교수다. 이 과정에서 "매국노는 이 땅을 떠나라"는 등의 협박전화가 밤낮없이 걸려 오고 험악한 욕설로 가득 찬 편지가 수도 없이 날아들었다. 학회 발표장에 몰려온 유림들이 발표를 방해하고 주먹까지 휘두르는 바람에 제자들이 막아서지 않았다면 폭행을 당할 뻔한 일도 많았다.

77년에는 당시 몸담고 있던 성균관대에 유림들이 투서를 하고 총장을 찾아가 김 교수를 해고할 것을 종용했다. 강연과 집필도 막았다. 결국 대만으로 피신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81년 연세대로 옮겼다. 김 교수가 정년퇴직한 이후인 2000년부터는 아들 김상용 교수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는 법무부 가족법개정특별분과위원회 위원과 여성부 정책자문위원 자격으로 지난 2일 통과된 민법 개정안의 틀을 만들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토론회에 나설 때면 언제나 방청석에서 아들을 후원했다. 아버지는 지난 2일 민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직후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내 평생 바라던 것을 다 이뤘다"며 감격을 함께 나눴다.

김 교수 부자가 호주제 폐지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 낸 주역들이라면 이석태 변호사와 서울대 생명과학부 최재천 교수는 지난달 3일 헌법재판소에서 호주제의 헌법 불합치 결정을 이끌어 낸 인물들이었다.

민변 소속인 이 변호사는 2000년 호주제에 대한 위헌소송을 제안한 인물이다. 최 교수는 호주제의 위헌 여부를 가리는 공개변론에 진술인으로 참가해 "부계혈통 계승은 생물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적 근거 제시로 헌법 불합치 결정을 이끌어 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민주노동당의 노회찬 의원도 호주제 폐지와 관련해 여성들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는 법무부가 제출한 민법 개정안보다 훨씬 진보적인 내용의 법 개정안을 독자적으로 발의했다.

법무부의 가족법개정특별분과위원회의 위원장이었던 성균관대 이승우 교수, 호주제 폐지 홍보대사를 맡았던 탤런트 권해효씨도 호주제 폐지운동의 버팀목들이었다.

문경란 여성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