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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암살 위해 무기 필요하다 함께 손잡자' 黃씨 제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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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북한 노동당 창건일인 10월 10일,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운명했다. 김정은이 축포를 쏘며 군중 앞에 화려하게 등장하던 바로 그날, 그는 그렇게 세상을 등졌다.

1997년 황장엽 망명 때 ‘숨겨진 진실’ 있었다 #당시 특종보도한 전직 기자(김용삼 경기도지사 정책보좌관)가 밝힌 비화 #북한 親황장엽·민주화세력 숙청

1997년 2월 12일 황 전 비서는 중국 베이징(北京)의 한국총영사관으로 전격 망명했다.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비서,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 그리고 주체사상의 창시자라는 타이틀이 갖는 무게 만큼 그의 망명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북한 당국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북은 대번에 납치를 주장했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그가 망명을 결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현재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정책보좌관을 맡고 있는 김용삼(52) 전직 기자다. 그는 황전 비서의 망명 사실이 알려지자 친필서신·대화록 등 황장엽 관련 문건 및 자료를 지속적으로 단독 보도해 국내외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그만큼 ‘황장엽 망명’과 관련해 가장 많은 부분을 알고 있을 인물인 셈이다. 시기적으로 민감해 그가 아직 다 밝히지 못한 ‘망명의 진실’은 없을까? 황 전 비서 사망 이튿날 그를 만나 진실 추적에 나섰다.

-망명 당시 ‘황장엽 파일’을 다량 입수해 보도했습니다. 아직 공개하지 못한 문건은 없는지요?
“매우 조심스럽습니다만….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공개하지 못한 것입니까?
“(잠시 뜸을 들인 뒤) 북한 군사 관련 자료 등입니다. 왜 미공개로 남았는지 대략 짐작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정보기관에는 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자료를 넘겼습니다. 또 당시에는 만일 이런 자료들이 세상에 알려질 경우 황 선생이 간첩 행위를 한 것으로 오인될 소지도 있었습니다. 또 북한에서는 우리가 어떤 자료를 입수했는지도 모르는데, 굳이 알려서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 없다고도 판단했습니다.”

애초 1997년 4월 방콕·뉴델리 망명 계획
-황 전 비서 망명에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망명 중개인인 이연길(3월 작고) 씨와 함께 오랫동안 황 선생의 망명 작업을 준비했습니다. 1995년 연말 이 씨가 중국 선양(瀋陽)에서 외화벌이를 하는 김덕홍 씨를 만났습니다. 이후 김 씨를 좀 도와주기 시작했는데, 1996년 5월께 이 씨가 베이징에서 황선생을 만난 겁니다. 그 후 여러 차례 만남을 가졌는데, 이 씨는 가기 전에 꼭 저와 회합을 가졌습니다. 제가 직접 나서지는 않았지만 현지 호텔방에 대기하면서 내용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 해 여름쯤 되니까 심각한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그 양반들이 북한 민주화를 위해 ‘김정일을 암살해야 한다’ ‘무기가 필요하다’면서 함께 손잡고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죠. 이런 이야기가 나오니 더 이상 감당이 안 되더군요. 그래서 그 해 9월에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 넘겼습니다. 하지만 한 달쯤 지나자 안기부와 그들 사이에 견해 차이가 있었는지 접촉선이 끊어진 겁니다. 결국 다시 이 씨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재차 안기부가 나서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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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김 전 기자는 망명 실행 시기와 관련해 “예정과 달리 앞당겨진 감이 있다”고 말했다.
“1997년 4월 황 선생이 인도 뉴델리에서 열리는 비동맹 회의에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하기로 돼 있었습니다. 중간 기착지인 태국 방콕이나 뉴델리에서 망명을 선택하겠다고 했죠. 저는 그렇게 알고 출장을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망명 사건이 터진 겁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실 나는 황 선생의 망명을 강력하게 반대했다”고도 언급했다.

“김현희 씨를 보면 잘 알 수 있지만 황 선생이 한국에 와도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또 한국 내 좌익들 때문에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다는 점도 강조했죠.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북한에 남을 가족 문제도 있었고요. 그래서 저는 북한에서 나오지 말고, 오히려 그 안에 남아 우리와 함께 북한 민주화를 도모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던 겁니다. 그랬더니 황 선생이 ‘가족이 함께 못 나오더라도 죽이지는 못할 거다’라고 말했습니다. 황 선생의 부인(박승옥)이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이 죽은 뒤 어린 김정일을 돌봐준 일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였죠. 또 아들 황경모 씨가 장성택 집안 사람(며느리가 장성택의 조카)과 결혼한 사정도 감안될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북한에 가족을 두고 망명한 경위에 대해 여전히 의문점이 많습니다.
“사실 가족을 먼저 빼돌린 뒤 황 선생을 모시려고 했습니다. 1996년 가을께 추진하려고 했죠. 선양의 한 호텔을 매입해 황경모 씨에게 운영을 맡긴 뒤 자연스럽게 가족을 데려오려 한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호텔을 사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팔려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황 전 비서 망명 후 가족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습니까?
“망명 후 3년이 지났을 무렵 함경북도와 함경남도 경계에 있는 험한 지역에 부인·아들·딸·며느리가 유배됐다고 들은 바 있습니다. 제가 접한 마지막 소식입니다.” 그들의 마지막 운명과 관련해 10월 12일 고인의 빈소를 찾은 김영삼 전 대통령은 “현재 황 전 비서의 부인과 아들 모두 미국에서 자살했고, 딸마저 죽어 가족이 하나도 없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어지는 일문일답.

-황 전 비서는 북한 최고위급 인사였습니다. 혹 평양 고위층 중에 그와 뜻을 같이하는 인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습니까?
“황 선생은 북한의 진짜 민주화 세력들, 자신과 깊은 대화를 나눴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 남한과 평화로운 세상을 열기 위한 원대한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가 전해 듣기로는 상당히 고위층 인사들입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1996년 12월입니다.”

“생존하는 ‘친황장엽 인사’는 말 못한다”
이 대목에서 김 전 기자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만일 해당인의 이름이 밝혀질 경우 발생할 문제, 즉 본인 및 관련자 숙청 등이 예상되기 때문에 절대 밝힐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또 황 전 비서의 입을 통해 직접 전해 들은 것이 아니라는 단서도 달았다. 결국 설득 끝에 이미 사망한 대표적인 두 인사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황 선생이 망명하고 그 해 11월 공개총살을 당한 북한의 서관희 농업담당비서입니다. 명목상으로는 농업 지도 실패를 책임으로 물은 것이었죠. 서관희가 체포되던 당시 일본 <산케이><요미우리>에 서 씨가 한국과 접촉한 증거가 나왔고, 그와 같이 일하던 젊은 사람 11명도 함께 체포됐다는 보도가 나온 적도 있죠. 또한 사람은 2003년 6월 평양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김용순 대남담당비서입니다. 평양에 차가 몇 대나 있겠습니까? 보통 독재국가에서 그런 식으로 처리하기도 하죠.”

사망한 김용순 노동당 비서는 북한 실세 중의 실세였다. 김정일의 외가 쪽 친척으로 알려진 그는 김정일의 누이동생인 김경희 현 노동당 경공업부장과 각별한 사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오랫동안 국제담당비서를 역임한 그는 1992년 대남담당비서 겸 통일전선 부장에 임명됐다. 이후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등에도 올라 대남 총책으로 활약했다. 문민정부 시절 김일성의 돌연한 사망으로 실패한 남북
정상회담 교섭과정에서도 핵심 역할을 맡았다. 예비접촉 북측 대표단장으로 서울을 방문, 우리측 수석대표였던 이홍구 전 총리(당시 부총리)와 극적인 타협안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김용순이라는 이름은 상당히 의외입니다.
“우리로 치면 북한의 국정원장에 해당하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황 선생과 교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 파장이 어마어마하겠지요. 그래서 김용순의 사망 이후에도 그의 이름을 공개하지 못한 사정이 있습니다.” 황 전 비서의 망명을 물밑에서 도왔지만 정작 그가 황 전 비서를 직접 대면한 것은 국내에 들어와 공식 인터뷰를 하면서였다고 한다. 배석한 정보기관 요원들 때문에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황 전 비서는 그가 큰 도움을 준 사실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입니까?
“3월에 이연길 씨가 돌아가셨을 때 빈소에서 인사를 나눴습니다. ‘어떻게 사십니까?’ 했더니 ‘내가 요즘에 소리가 들려’ 하시더군요. 자꾸 하늘나라에서 빨리 오라는 소리가 들린다는 겁니다. 걸음걸이를 보니 제대로 못 걸으시더군요. 기력이 다 쇠했다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오래 못 사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터뷰 말미 김 전 기자는 “나이 차는 많이 나지만 진짜의기투합하는 동지라고 생각했다”면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글 김상진 월간중앙 기자 [kine3@joongang.co.kr]
사진 정치호 월간중앙 사진기자 [tode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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