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합니다] '화장하는 남자'가 있다는 걸 아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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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눈치보여 늘 각잡고 앉아있기 바빴던 이등병 시절. 어쩌다 내 손으로 들어온 초코파이 하나에 떨리는 가슴 안고 화장실로 향했던 그 때의 기억은 남자들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군대시절 추억으로 손꼽힌다. 그런데 여기, 조금 다른 추억을 이야기하는 남자가 있다.

"남들이 화장실에서 몰래 초코파이 먹을 때, 전 화장실에서 몰래 '화장'을 했죠"

군대와 화장?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는 이 두 단어를 너무나 당연하게 내뱉는 이 남자. 다 큰 장성들 그득한 군대에서도 대대장을 찾아가 '파우더 허용'을 요구했다는 이 남자는 바로 '화장하는 남자' 이병철(28)씨다.'저 사람, 선임들한테 많이 맞았겠네'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놀랍게도 그와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엔 '이상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그의 끈질긴 '화장 사랑'에 두손 두발 다 들었단다. 오히려 외박이나 휴가가 다가올때면 선임들이 먼저 이씨를 찾아와 훈련받느라 망가진 자신의 피부를 들이밀며 관리를 부탁하곤 했다.

지난 11일, 경기도 의정부에 위치한 이씨의 집을 찾았다. 마치 '화장품 가게'에 온 마냥 그의 집안은 온통 화장품으로 가득했다. 안방은 물론, 거실부터 욕실까지. 여자인 취재진도 난생 처음보는 화장품 종류들이 즐비해 있었다. 외출을 위해 화장을 하는 이씨의 모습을 지켜봤다. 단순 스킨·로션이나 자외선 차단제, 기껏 해봐야 BB크림 정도가 전부일 것이라고 생각한 취재진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스킨·로션→자외선 차단제→프라이머(피부결을 정돈시켜주는 제품)→파운데이션→컨실러(여드름,다크서클 등 피부 결점을 감추기 위한 제품) →파우더→하이라이터(얼굴의 명암을 강조하는 제품)→마스카라→눈썹정리→블러셔(볼에 바르는 색조 제품)→립밥(입술에 바르는 제품).

이씨의 화장하는 순서이다. 일반 여성들보다도 더욱 섬세하고 체계적인 화장술을 선보인 이씨는 화장품의 성분이나 효과를 하나하나 체크하는 등 전문가 못지 않은 모습이였다.

화장을 끝내고 외출에 나선 이씨는 명동으로 향했다. 한 화장품 매장에서 주최한 뷰티클래스(화장법을 알려주는 강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화장법을 배우기 위해 모인 수많은 여성들 사이에서 이씨는 이 날 뷰티클래스에 참석한 유일한 남성이였다. 심지어 여성들도 꺼려하는 시범 모델에 자진해서 나서는 등 여느 여성 못지 않은 '화장 예찬'을 내비췄다.

초등학교 시절 호기심에 발라 본 어머니의 '빨간 립스틱'은 이씨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립스틱을 시작으로 조금씩 화장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는 "조그만 화장품이 얼굴에 가져다 주는 '변화'에 반했다."고 말했다. 그런 이씨를 본격적인 '화장의 길'로 인도한 사람은 다름아닌 '어머니'. 아들의 남다른 관심분야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던 어머니는 오히려 '직접' 화장품을 사보라며 용돈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화장품을 구입할 때마다 '어떤 화장품이 좋은지' 아들인 이씨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이씨는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신경쓰지 않는다"며 "'화장은 여자만 하는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 각종 방송출연을 통해 당당히 '화장하는 남자'로 자신을 알린 이씨는 5천명이 넘는 네티즌이 지지하는 파워블로거로 등극했고 뷰티업계에서는 화제의 인물로 떠오르며 각종 행사에 초청받는 등 '화장'을 자신을 상징하는 '매력'으로 발전시켰다. 이씨는 "일본의 유명 뷰티저널리스트인 '히로유키 오타카’와 같은 '화장 전문가'가 되는 것이 꿈"이라며 "언젠가는 '남성'도 여성만큼이나 '화장'과 어울리는 날이 올 것"이라며 웃어보였다.

영상 김정록, 글 유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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