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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니어링과 정호열 공정위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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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정호열 공정거래위원장은 최근 본지 인터뷰에서 어렵고 힘들 때마다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을 ‘밑줄 그으면서’ 읽었고 이를 마음에 새긴다고 했다. 좀 뜻밖이었다. 니어링이 누군가. 그는 철저하게 시장 바깥에서 한평생을 보낸 인물이다. 188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평생을 자본주의와 싸웠다. 젊은 시절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다가 전쟁에 반대하고 급진론을 편다는 이유 등으로 두 차례나 해직됐다.

 생의 후반기엔 반(反)자본주의적 생활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버몬트주와 메인주의 외딴 농장을 찾아 자립농으로 살았다. 먹을거리와 집과 땔감을 스스로 마련하는 자급경제를 고집스레 유지했다. 그는 왜 시장에서 벗어나려 했을까. 자서전에서 설명이 됨직한 말들을 찾아봤다. “이윤을 남기기 위한 자본주의 경제는 노동력과 현금의 맞교환을 전제로 삼는다. …이런 방식을 받아들이는 개인은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노동시장과 생필품시장과 국가에 맡기는 셈이 된다.” “모든 계급사회의 밑바탕에는 ‘네가 일하고 나는 먹는다’는 원칙이 깔려 있다. 이 원칙은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대신 뿔뿔이 떼어놓는다.”

 그는 자연에 파묻혀 사는 시골생활을 “미친 세상에서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삶의 한 예이자 본보기”라고 했다. 생계를 위한 노동 네 시간, 지적 활동 네 시간, 좋은 사람들과 친교하며 보내는 네 시간이면 ‘완벽한 하루’가 된다고도 했다. 당시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라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갔다.

 니어링의 어떤 점이 정 위원장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어찌 보면 두 사람이 서 있는 자리는 극과 극이다. 니어링은 시장으로부터의 탈주를 온몸으로 실천했던 이지만 정 위원장은 경쟁이 효율적이고 소비자에게도 좋다고 믿는 시장주의자다. ‘시장경제의 파수꾼’ 공정위를 이끌고 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9·29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대책’을 만들 때도 납품단가 연동제 같이 시장원리에 어긋나는 중소기업계와 정치권의 과도한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마 정 위원장은 니어링에게서 사상보다는 원칙을 지키려는 태도를 높이 샀을 것이다. 삶을 끝까지 밀어붙이려는 자세도 그렇다.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일을 하기 위해, 그것도 있는 힘을 다해 힘닿는 데까지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다” 같은 자서전 대목에서 아마 밑줄을 좍 긋지 않았을까.

 정 위원장은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 그러나 무책임하게 양쪽을 비판하고 빠지는 것이 아니라 원칙을 지키는 중도가 중요하다”고 했다. 또 “중도실용주의가 대의민주주의와 영합할 때 가장 나쁜 결과가 포퓰리즘”이라며 “공정위가 시장 원칙에 어긋나는 제도나 정책을 몸을 던져 막아야 하는데 힘이 별로 없다”는 말도 했다. 그의 말대로 공정위가 정치권과 정부 부처의 반시장적 행태를 막는 데 힘이 부칠 수 있다. 하지만 니어링의 ‘결기’를 마음에 새겼다면 꼭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다. 니어링은 100세가 되던 해, 스스로 곡기를 끊어 생을 마감했다.

서경호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