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이창호 같은 이세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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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결승1국
[제8보 (86~100)]
黑 .이세돌 9단 白.왕시 5단

86은 A의 약점을 선수로 보강한 수. 형세가 급하지 않다면 후수라도 B로 늘어두는 것이 두텁다. 그러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지금은 한시바삐 상변의 화약고로 되돌아가야 한다.

왕시(王檄)5단은 88로 응수를 떠본다. 막아준다면 이어서 그 자체로 대마는 살아있다. 한발 물러서준다면 이득이다. 강타자 이세돌9단의 응수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89. 한 걸음이 아니라 아예 열 걸음 물러서버렸다.

"뒷맛을 깨끗하게 정리한 수. 잡으러가겠다는 신호이기도 하다."(박영훈9단)

서봉수9단은 한 집은 땅이고 두 집은 하늘이라고 했다. 프로들은 단 한 집을 놓고 천지개벽의 변화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 이 같은 실리에 대한 애착은 종종 대세를 보는 눈을 멀게 만들기도 한다.

89 쪽의 백은 죽어있지만 바로 89 자리를 이어 여러 모로 활용하는 수단이 있다. 외곽의 흑이 끊겼을 때 큰 사고를 만들 수도 있다. 89는 거기에 대비한 수. 그러나 형세가 나빴다면 이런 식의 흔쾌한 '서비스'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참고도1' 흑1로 두면 대마는 살 길이 없기에 90, 92로 살았다. 너무 궁색해 눈물이 나도록 두고 싶지 않은 수였다. 그러고나서 94. 귀의 근거를 잡아놓고 왕시는 기다린다. 죽고 사는 문제는 거의 끝났다. 그러나 백은 사방이 엷어 고통스럽다. 주도권은 상대에게 있으므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이때 등장한 이세돌의 다음 한 수(95)가 관전객들을 또 놀라게 한다. 승리가 보이고 있지만 그는 평소의 이미지와 달리 서두르지 않고 있다. 무색무취의 이 한 수는 이세돌의 수가 아니라 이창호의 수 같다. 동요하지 않는 이세돌의 마음이 왕시를 격발시킨 것일까. 96부터 왕시는 재차 중앙대마를 쫓기 시작한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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