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2. 안과 바깥 <10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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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나는 택이에게 이렇게 썼다.

나 하산한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소문에는 우석이와 울산 부근에 있다는데. 누가 가르쳐 주었어. 해운대 부근인가 아니면 그 위의 송정인가에서 바람 부는 날, 바다와 결혼했다던데. 신혼 재미가 어떠한고.

그것은 신우석이에게서 성진이한테 온 엽서를 보고 쓴 편지였다. 우석이 글에 의하면 그들이 부산 시내를 벗어나 동해안을 따라 오르다가 어느 바위 절벽에서 다리 쉬임을 했다고. 택이가 근처 밭에 가서 옥수수를 따왔는데 설익었는지 알갱이가 그냥 문드러질 정도였단다. 둘은 아침부터 쫄쫄 굶어서 기운도 없었다는데. 날옥수수를 그냥 뜯어 먹었다지. 바람이 어찌나 심하게 부는지 벼랑가에 나서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더란다. 택이가 허청거리며 절벽 가장자리에 서더니 물건을 꺼냈다. 그러고는 냅다 용두질을 쳤다고. 우석이 엽서에 의하면 택이 녀석이 발뒤꿈치를 들고 흠칫 마지막 몸서리를 치는 어깨 동작까지 확인했다는 것. 그러고는 바다에게 장가 들었다고 으스댔다는 것이다. 우석이는 돌아왔지만 택이는 한 일년 가까이 강원도 산골의 화전민 노부부를 만나서 어울려 농사를 지으며 아들 노릇을 했다고 한다. 호랑이도 여러 번 보았다던가. 그 녀석은 거리에서 포장마차나 허드레 음식을 파는 데를 지나다가 옥수수와 찐감자의 냄새만 나도 피해 갈 정도였다. 옥수수와 감자라면 평생 먹을 분량보다 더 먹었다고 한다. 그러니 내 메모가 적힌 책이며 택이의 짐들은 나중에 우석이가 동굴에서 찾아다가 보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집에 돌아가니 여전히 누나들은 성실하게 대학에 잘 다니고 있었고 어머니는 겉으로는 당당하고 냉정한 것처럼 보였지만 기가 많이 죽어 있었다. 그녀는 내가 무엇을 하든 반대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했다. 나는 글을 좀 써 보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고는 친구네 간다며 짐을 다시 꾸려 가지고 나왔다. 집을 나서는데 언덕 중간쯤까지 내려간 나를 어머니가 불렀다. 나는 일단 가장과 책짐을 내려놓고 비탈을 올라갔다. 어머니가 내게 뭔가 내밀었다.

-나두 이거 어디서 얻었다. 그리구… 술 먹지말구 맛난 거 사먹으렴.

어머니는 내게 돈 얼마를 주었고 무슨 길쭉한 갑에 싼 것을 내밀었다. 나는 아무렇게나 윗주머니에 쑤셔넣고는 돌아섰는데 나중에 보니 만년필이었다. 얻기는 뭘, 그녀가 신중하게 골랐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 물건 사는 꼼꼼한 솜씨는 알아주니까. 어머니는 마치 온 식구가 지긋지긋해하는 낚시 취미에 빠진 남편에게 명품 낚싯대를 사 바치는 아내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내심으로는 소설 따위는 쓰지 말았으면 하고 바랐지만 혹시 거스를까 달래려는 심정이었을까.

장 무네 화실 위의 천장에 올라가 청소를 하고 비닐장판을 두어 평쯤 사다가 깔았다. 과연 무가 베니아 판때기를 잘라서 앉은뱅이 책상을 만들어 주었는데 어찌나 탄탄하고 높이도 적당했는지 나는 나중에 귀가할 때 집필 전용으로 그것을 들고 갔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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