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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부실 공약 리콜은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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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정치인 가운데 기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여러 인물이 있다. 구름 잡는 화법으로 말을 쏟아내 기사의 가닥을 잡아내는 데 땀을 빼게 만든다. 이들 가운데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나 재작년에 타계한 김윤환 신한국당 고문을 대표적으로 손꼽을 수 있다. 두 사람 다 정치판을 읽는 눈이 빠르다. 상황 변화에 대한 적응력도 대단하다. 그러나 그들의 발언은 애매한 대목이 많아 해석에 종종 혼선을 빚는다. 시류에 따라 여의치 않으면 유리한 쪽에 갖다 붙일 수 있는 의견을 내놓는 데 익숙하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보도가 나가면 '와전됐다'거나 '잘못 알려졌다'며 어려운 국면을 빠져나갔다. 좋게 이야기하면 선문답을 즐기는 것이요, 달리 봐서 노련한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실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이들의 어법과 화법은 애매와 모호 그 자체다. 개념이 불확실한 명사와 형용사가 나열될 때 초점을 잡기 힘들다. 그런데도 김종필 전 총재의 화법은 해박한 지식을 깔고 있고 거기에다 정치 놀이, 삶의 놀이를 교묘하게 반죽한 이념이 녹아 있기 때문에 매력적이기도 하다. 그들은 인내와 배려를 특장으로 한 나름대로의 경륜과 업적을 평가받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신과 불법 정치자금, 음모의 이미지를 떨치지 못했으며 애매한 화법이 정치역정에 그늘을 더욱 짙게 했다. '애매의 정치'는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누구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아서이거나 무능의 소산이다.

참여정부가 추구하는 여러 정책 가운데 투명성의 원칙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국가와 기업의 신인도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되는 것은 여러 분야의 혼란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성장의 내용과 그 폭이 들여다보이고 또 믿을 만하다는 뜻이다. 시장이 주가를 끌어올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현 정부는 환경문제에 관한 한 애매의 전략이라는 미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도피처인지 모른다. 권력 주변에 있는 그 많은 똑똑이의 발언은 모호하기 이를 데 없다.

북한산 관통도로(사패산 터널) 공사 저지운동이 한창이었던 재작년 말 노무현 대통령은 마침내 어느 사찰을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그가 대선 후보 시절에 내건 '사패산 터널공사 중지' 공약을 공식적으로 철회한 적이 없다. 올해는 천성산 터널 공사 저지운동과 관련해 국무총리가 여승의 단식투쟁을 만류하기 위해 또 절을 찾아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역시 대선 공약이었던 '천성산 터널 공사 중지'를 철회한 일이 없다. 집권하고 보니 국가적인 사업들을 중단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당연히 공약을 철회하는 절차와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과거 어느 대통령도 잘못된 공약을 공식적으로 철회한 적이 없다. 정치적인 위험부담이 컸다. 그래서 모두들 얼렁뚱땅 넘어갔다.

참여정부마저 전례에 따라 애매한 태도로 일관하는 모습은 투명성의 원칙을 짓밟는 일이다. 어떤 것은 투명성을 강조하고 어떤 것은 애매성으로 가려버린다면 결코 새 정치가 아니다. 기업이 부실 제품을 자진해 리콜할수록 시장에서 기업가치는 더욱 올라간다. 국민의식이 그만큼 달라졌다. 집권 3년째를 맞은 노 대통령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대선 당시의 부실 공약을 검토해 리콜해 주기 바란다. 이것이 맑고 깨끗한 정치를 지향하는 그의 이미지와 맞는 일이다. 얼마나 당당한가.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가 부실공약을 투명하게 처리하지 못해 특정집단을 찾아가 머리 숙이는 장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최철주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