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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윤이상] 中. 정중동(靜中動)의 음악 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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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 윤이상씨는 자신의 작품이 연주되기 전 리허설을 참관하면서 자신의 의도를 연주자에게 전달하려 애썼다.

작곡가 윤이상의 작품은 40대 이후 독일에서 작곡한 것만 해도 줄잡아 120곡이 넘는다. 오페라.교향곡.협주곡.실내악에 이르기까지 장르도 매우 다양하다. 그는 1995년 독일 자르브뤼켄 방송국이 선정한 '20세기의 최고 작곡가 30인'중 한 명으로 뽑혔고, 마틴 멤러가 쓴 '20세기 작곡가 85인'(99년)에 포함됐다. 현대음악사에 독보적인 위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다.

독일의 음악학자 크리스티안 마틴 슈미트는 '현대음악의 초점'(97년)에서 작곡가 윤이상을 가리켜 '다원적 코스모폴리탄'이라고 했다. 작곡가로서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윤이상의 특징을 가장 잘 짚어낸 표현이다. 그는 불교.유교.도교 등 동양의 정신세계를 서양의 현대 작곡기법과 악기로 승화시켜 독자적인 음악언어를 창출했다. 또 음악을 통해 세계평화를 갈망했다. 폭력과 불의, 환경파괴를 작품에서 과감히 고발했다.

12음 기법의 창시자인 아놀드 쇤베르크의 제자인 요제프 루퍼를 사사했지만 음렬(音列.한 옥타브를 구성하는 12개의 음이 한번씩 나오는 주제)음악의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중심음(Hauptton)이라는 독창적인 어법을 개발해냈다. 화려한 장식음을 보태 각각의 음이 풍부한 음색 변화를 동반하면서 고유의 생명체처럼 살아 움직이며 흐르도록 했다. 바로 한국의 아악(雅樂)에서 느낄 수 있는 특징이다. 가야금 줄을 떨어 소리를 내는 농현(弄絃)을 관현악에 적용한 것이다. 윤이상이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린 출세작은 59년 독일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 초연된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이다. 철저히 서양기법에 충실했고 악보에는 수많은 음표가 난무했지만 실제로 들어보면 신비로운 단아함이 느껴진다. 유럽 음악가들이 이 작품을 주목한 것도 '정중동(靜中動)'의 세계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의 현대음악은 수학 공식 같은 논리체계를 갖춘 음악기법을 구사했지만 인간 감성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는 비판을 듣고 있던 터였다.

윤이상의 음악은 다른 현대음악과 마찬가지로 처음엔 듣기가 어렵다. 연주하기는 더 힘들다. 하지만 한 번 그의 작품을 접해본 연주자들은 점점 빠져든다. 음악학자 홍은미씨는 "윤이상의 작품은 아방가르드 기법과 철저한 논리로 무장하고 있지만 이를 뛰어넘는 무한한 정신세계도 담고 있다"며 "단순히 귀를 만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이로 하여금 자기 성찰을 하게 만드는 게 매력"이라고 말했다.

국제윤이상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독일의 음악학자 볼프강 슈파러는 윤이상의 작품 세계를 크게 세 시기로 나눈다. 동서양의 만남이 한층 세련돼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가는 과정이다. 아방가르드 경향과 더불어 한국의 전통음악에 충실했던 60년대와 70년대 초반에는 실내악.오페라를 주로 작곡했고, 70년대 후반에는 협주곡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마지막 시기인 80년대와 90년대 초에는 성악을 동반하는 작품과 교향곡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초기의 난해했던 작품 경향은 90년대 들어 점차 쉬워지고 따뜻해진다. 92년 작인 관현악 '신라'가 2000년 통영국제음악제에서 국내 초연됐을 때 청중은 '뜻밖의 포근한 감동' 때문에 오히려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윤이상의 음악은 정치 현실을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동백림사건 때의 쓰라린 체험은 그의 작품에서 정치성이 짙어지는 데 한몫했다. 볼프강 슈파러는 그의 '교향곡 제1번'(83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윤이상은 7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음악에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점차 비중 있게 반영하고 있다. '교향곡 제1번'은 핵에너지의 무책임한 사용, 공격적인 무기에 위협받는 평화, 파괴되는 자연에 대해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오보에와 하프를 위한 2중 협주곡 '견우와 직녀 이야기'(77년)는 분단된 조국의 아픔과 통일을 염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칸타타 '사선에서'(75년)는 나치에 의해 처형된 시인 하우스 호퍼의 시로 자유와 해방을 웅변한다.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81년)는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에 항의하는 뜻을 담았다. 그는 작고하기 1년 전인 94년에는 민주화 과정에서 분신한 이들에게 헌정하는 교향시 '화염에 싸인 천사'도 발표했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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