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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의 세상 탐사] 역사의 기습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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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호 02면

역사 전개는 안개다. 거대한 역사의 전환은 예측하기 힘들다. 역사의 굉음이 울릴 시점은 알 수 없다. 인간은 변환의 수상한 기미와 심상찮은 조짐 정도를 안다. 하지만 시대의 주인공은 인간이다. 리더십들은 역사의 무대를 극적으로 꾸민다. 소련의 종말은 실감 나는 사례다. 공산주의 소련의 해체는 허망했다. 누구도 그런 방식의 퇴장을 예측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역사는 리더십의 의지와 전략으로 장엄하고 긴박하게 펼쳐졌다.

모스크바 강변의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역. 러시아 장례문화의 예술적 정취가 담겨 있다. 그곳에 니키타 흐루쇼프(소련 공산당 제1서기·사진 위), 보리스 옐친(러시아 대통령·사진 아래)의 무덤이 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소련 대통령)의 부인 라이사도 잠들어 있다. 수도원 옆 강가는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산실이다.

소련의 대변혁은 고르바초프의 작품이다. 1991년 8월 반개혁 쿠데타가 있었다. 고르바초프 부부는 흑해 별장에 구금된다. 그들은 휴가 중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최후의 순간에 대비했다. 육성을 녹음했다. “인정할 수 없는 쿠데타다. 인민들은 이처럼 기막힌 일을 알고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 부인 라이사는 연금 나흘간 한순간도 자지 않았다. 잠든 사이의 공포감 때문이다. 누군가 들어와 남편으로부터 격리시킬까 두려워했다. 죽더라도 함께 죽으려 했다. 묘소의 조각상은 애잔한 사랑을 펼치는 우아한 여인의 모습이다.

그때 모스크바에서 옐친은 저항했다. 그는 쿠데타군의 탱크에 올라갔다. 국민적 반격을 주도했다. 러시아 삼색기(백·청·적)가 등장했다. 소련 체제의 해체에 대한 그의 의지와 용기는 단호했다. 쿠데타는 실패했다. 옐친 무덤의 형상은 숨가쁜 당시를 연상하게 한다. 러시아 삼색기의 휘날리는 이미지다. 그 이미지는 옐친 집권 시절의 국정 혼선을 잊게 한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정의감은 흐루쇼프와 연결돼 있다. 흐루쇼프의 무덤은 역사의 굴곡과 파란을 떠올린다. 그 시절 크렘린 최고지도자들은 붉은광장 레닌 묘 뒤쪽에 안장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묻히지 못했다. 권좌에서 축출된 뒤(1964년)에 죽음을 맞아서다.

그의 무덤 조각의 조형미는 독특하다. 흰 대리석과 검은 대리석이 깍지를 끼듯 맞물린 모습이다. 흰색은 그가 주도한 오치펠(해빙·解氷)을 상징한다. 해빙은 문학의 봄을 열었다. 정치범들의 대량 복권과 석방이 이어졌다. 검은 대리석은 헝가리 봉기 진압, 해빙의 한계를 의미한다.

그는 1956년 2월 소련 공산당 20차 전당대회 연단에 선다. 그 ‘비밀 연설’은 4시간가량 계속된다. 스탈린 격하연설이다. 스탈린 죽음 3년쯤 뒤다. 그 영향력이 남았던 시점이다. 그는 스탈린의 잔혹한 공포정치를 고발했다. 고문·처형의 참상을 구체적 사실로 폭로했다. 사실은 역사의 흐름을 장악한다.

그는 스탈린 시대의 조연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반전을 결심했다. 스탈린 시대를 전율 같은 충격을 주어 마감하려 했다. 거기에는 인간성 회복에 대한 열망이 깔려 있다. 그 연설은 소련 역사에서 가장 비장하고 긴박한 장면이다.

무덤 조각 사이 그의 흉상은 상념을 낳는다. 권력의 패배자로 죽음을 맞았지만 역사를 진전시켰다는 당당함이 드러난다. 역사는 지도자의 용기와 비전으로 발전한다. 그의 연설은 젊은 시절 고르바초프의 뇌리에 강렬하게 자리했다. 흐루쇼프는 소련 체제를 재정비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연설로 공산주의는 퇴장의 길로 들어선다.

역사는 기습한다.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도 그렇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한반도는 소용돌이의 전환기에 들어갔다. 김정은 3대 세습체제는 불투명하다. 전환의 시대는 특별한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 전광석화 같은 역사의 전개에 대비할 역량을 요구한다. 역사적 감수성은 탁월해야 한다. 이명박 정권 주역들의 역량과 역사 인식은 어느 정도일까. <모스크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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