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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층 화재 당하고 보니 … 고층아파트 방재 매뉴얼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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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화재 초기에 빨리 유리를 깨고 진화했더라면 꼭대기 층으로 번진 대규모 화재를 막을 수 있었다. 답답한 우리가 소방 호스를 가져올 때까지 소방관들은 무엇을 했느냐.” 3일 오후, 부산시 해운대구 마린시티 내 주거용 오피스텔인 우신골든스위트 로비에서 열린 입주자 비상대책위원회는 고층 아파트 화재와 진화에 대한 모든 문제점을 쏟아내는 현장이었다. 당장 정부 차원의 종합적인 대책 마련이 뒤따라야 한다는 거였다. 주민들은 우선 소방관들의 훈련 부족을 꼽았다. 고층아파트 화재에 대한 준비가 돼 있지 않아 신속하고 효율적인 진화를 못했다는 지적이다.


주민 김성진(45)씨는 “불났다는 연락을 받고 기장군에 있는 사무실에서 20분 걸려 화재 현장에 도착하니 소방차가 20여 대가 와 있었지만 불을 끄지 않고 도로변에 소방차만 세워두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해운대 소방서는 화재 현장과 불과 500여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소방차는 3분 만에 20여 대가 도착했지만 소방차들은 바로 화재 진압에 나서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평소 고층 화재 훈련이 거의 없어 신속한 초기대응을 못했다는 것이 주민들의 주장이다.

구조작업도 마찬가지였다. 주민 김숙미(54·여)씨는 “집에 있다가 검은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내려오는데 소방관들이 2층 은행문을 열려고 우왕좌왕하며 들어갈 길을 못 찾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그녀는 보안업체 직원에게 전화했더니 “‘탈출하려면 탈출하고 있으려면 그냥 있으라’는 무책임한 답변만 들었다”며 화를 냈다.

고층 아파트 건물 관리에 대한 문제점도 터져 나왔다. 경찰이 화재가 발생한 장소로 보고 있는, 4층은 각종 배관이 지나가는 층(PIT층)으로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금지된 곳이다. 소방법상 스프링클러 설치를 하지 않아도 되는 장소다. 관리사무소 측은 이러한 곳을 환경미화원 거주공간과 쓰레기 분류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결국은 불법이 대형 화재로 연결됐다는 얘기다.

화재로 전기가 나가면서 관리사무소가 대피 방송을 하지 못해 주민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야 했다. 아파트 방송 외 비상사태에 대비한 사이렌 등 경보시스템이 구축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주민 대피가 늦었고 자칫 대형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물론 소방 당국의 입장은 다르다. 김종규 해운대 소방서장은 “초기에 유리를 깨고 물을 쏘지 않은 것은 ‘백드래프트’ 현상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백드래프트 현상은 밀폐된 공간에 불이 났을 경우 문을 열거나 유리를 깨 공기가 들어가면 불길이 역류돼 큰 불길로 확산되는 것을 말한다.

또 김 서장은 “초기에 화재 진압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소방관들이 인명구조를 하면서 실내 소화전으로 진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외부에서는 화재 진압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해명했다. 또한 고층건물 유리창은 보온을 위해 작고 두껍게 만드는데 외부 충격을 줘도 쉽게 깨지지 않아 진화 작업을 어렵게 했다.

불쏘시개 역할을 한 외부패널에 대한 규제 방안도 마련돼야 한다. 현행 소방법에는 미관을 위해 설치하는 내·외장재는 규제를 하지 않고 있다. 실내 커튼과 카펫만 불에 잘 타지 않은 소재를 사용하도록 규제하고 있을 뿐이다. 전문가들은 화재 발생 시 대피 방안에 대한 주민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일본의 경우 고층건물 주민들에 대한 대피 훈련을 분기별로 실시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합동 소방훈련을 소방서와 합동으로 1년에 한 차례 실시하고, 한 차례는 건물 자체적으로 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대부분 형식에 그치고 있다.

부경대 소방공학과 최재욱 교수는 “이번 기회에 고층건물 내·외장재에 대한 규제와 거주 주민에 대한 대피 교육 등 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번 화재 사건을 수사 중인 해운대경찰서는 4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소방 당국과 함께 불이 난 4층 재활용품 수거장을 중심으로 정밀감식을 해 정확한 화인을 밝힐 계획이다. 경찰은 전기적인 요인 때문에 화재가 났을 가능성 등을 수사하고 있다.

한편 우신골든스위트는 지난해 소방시설 점검에서 29개 부분에서 시정명령을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국회 행정안전위 박대해 의원(부산 연제)은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우신골든스위트는 지난해 12월 소방시설 종합정밀점검에서 소화설비 17건, 경보설비 5건, 피난설비 2건, 소화활동설비(승강기) 5건 등 모두 29건의 불량 내용이 지적됐다”고 밝혔다.

부산=김상진·이한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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