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김정은 공동정권 ‘핵 협박’으로 국제무대 데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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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북한이 다시 한번 ‘벼랑 끝 전술’ 카드를 꺼내 들었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라는 한국과 미국의 압박에 도리어 “핵 억지력을 강화하겠다”고 맞받아쳤다. 더욱이 이는 북한 노동당 대표자회가 김정은을 2인자인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앉힌 직후 국제사회에 내놓은 첫 공식 입장이어서 주목된다. 북한이 3대 세습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대화보다는 대결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박길연 북한 외무성 부상은 29일(현지시간) 유엔 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미국 핵 항공모함이 우리 바다 주변을 항해하는 한 우리의 핵 억지력은 결코 포기될 수 없으며 오히려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의 핵무기는 자기방어를 위한 억지력”이라며 “선군 정치에 의한 강력한 전쟁 억지력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이미 수십 차례에 걸쳐 전쟁터로 변했을 것이고 지역의 평화와 안정도 파괴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 부상의 이 같은 강경 발언에는 나름의 계산이 깔려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천안함 사건 이후 한·미 양국의 군사적 압박에 초강수로 대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박 부상은 “천안함 사건의 기회를 이용해 미국과 남한이 한반도와 그 주변지역에서 대규모로 무력을 이용한 군사적 위협을 하고 있다”며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은 평화의 수호자가 아니라 파괴자라는 점을 다시 한번 의심 없이 입증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북한은 외부로부터 압력을 받을 때마다 강경 대응으로 응수해왔다.

선군 정치와 핵 억지력을 강조하고 나선 건 대내용이란 해석도 나온다. 군권 장악을 통해 세습을 시도하고 있는 김정은의 입지를 높여주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미국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북한을 지켜주고 있는 건 군과 핵 무기이며 이를 지휘하고 있는 장본인이 김정은이란 논리다. 즉 권력 승계 과정에서 외부의 적을 부각해 내부를 결속시키자는 것이다.

한편 박 부상은 대화의 여지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천안함 사건 관련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을 언급하면서 “모든 관련 현안을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할 것을 권장하고 있는 의장성명은 현안 해결을 위해 남북대화에 즉각 착수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한국전 발발 60주년이 되는 올해 정전협정에 참여한 당사국들에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회담을 가능한 한 빨리 시작할 것을 다시 정중하게 제안한다”고 밝혔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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