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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시론

빨치산 가문이 통치하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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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하지만 북한에선 이런 일이 ‘모순’이 아니다. 북한 주민 어느 누구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랬다가는 감옥에 가거나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다. 가장 큰 원인은 북한 체제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절대권력을 갖고 있는 수령이 통치하는 유일체제라는 데 있다. 헌법이나 당 규약보다 북한 체제를 움직이는 동력은 ‘당의 유일사상 확립 10대 원칙’이다. 요체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의, 김일성을 위한, 김일성에 의한 통치’다. 김일성 사망 후 ‘김일성’은 ‘김정일’로 대체됐다. 인사를 포함한 국정운영 방식이 헌법이나 당 규약에 규정돼 있지만 이는 형식에 불과하고, 모든 것을 사실상의 수령인 김정일이 좌지우지하고 있다. 통치이데올로기 정립이나 통치방식이 수령의 지시나 결심대로 이루어지는 체제가 바로 북한이다.

북한에서 수령체제가 본격 구축되기 시작한 것은 1967년 5월 이후부터다. 그래서 북한 역사는 67년 이전과 이후로 구분되기도 한다. 당시 빨치산파 김일성은 연안계·갑산파 등 다른 모든 정적(政敵)을 숙청한 후 1인 통치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사상과 영도의 유일성’과 ‘혁명 전통의 계승성’을 논거로 삼고, 이를 통해 주민들을 세뇌시켜왔다. 항일(抗日) 빨치산 활동이라는 혁명 전통을 갖고 있는 ‘김일성 가문’만이 대대로 통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통치 논리가 40년 가까이 북한 사회를 규정해 왔다. 최고통치자는 김일성 가문에서, 다른 고위 간부들은 주로 빨치산 활동을 한 혁명 가문들로 충원되는 게 북한 사회에서 하나의 불문율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김정은을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후계를 공식화한 것을 비롯한 이번 북한 인사에서도 이런 측면이 반영됐다. 빨치산 김일성의 딸인 김경희(정치국 위원)가 그렇지 못한 남편 장성택(정치국 후보위원)보다 높은 지위를 받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정치국 위원 김국태, 중앙군사위원 최용해, 당 부장 오일정은 각각 빨치산 1세인 김책, 최현, 오진우의 아들들이다.

북한의 후계자론에 따르면 최고지도자의 후계자는 수령의 지위를 이어받는 것이다. 총비서나 국방위원장 같은 어떤 직위(職位)를 계승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수령은 김일성 가문에서 나올 수밖에 없게 돼 있다. 연령이나 경력이 변수로 작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식의 세습은 왕조국가 북한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수령체제로 인해 북한이 90년대 초반에 벌어진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사태를 모면할 수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그러나 그런 공식이 계속 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경력이 일천한 20대 청년에게 급하게 권좌를 물려주는 것은 김정일로의 계승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역행적 행태로는 국가체계 유지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북한의 수령체제가 얼마나 오래갈 것인지 점치기가 쉽지 않다.

남측으로선 이런 체제를 숙명적으로 상대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크다. 특히 북한의 권력 변동은 유동성이 큰 만큼 남북관계 또한 안정보다는 격변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보다 고차원적이고 전략적인 마인드가 요청되는 이유다. 강경이나 온건 일변도가 아니고 이를 시의에 맞게 적절히 섞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마음에 안 든다고 아예 외면해 버리는 소극적 대처로는 사태를 수습해 나갈 수 없다는 점이다.

안희창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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