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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최소한’도 없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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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방수 커버라도 물이 조금이라도 샌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다. 하물며 명색이 수륙양용이라는 군사용 장갑차에 물이 들어오는 일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전면적으로 배반하는 상황 앞에서 우리는 흔히 ‘기본이 안 돼 있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다시금 비극의 천안함을 떠올리게 된다. 천안함은 본디 초계함으로서 배 밑에 달린 ‘소나’가 이 군함의 성격을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우리가 나중에 듣게 된 바로는 음향 탐지 기능을 갖고 있는 이 소나가 제 기능을 못했다는 것이다. 이야말로 참으로 기본이 안 된 얘기일 것이다. 레이더가 제 구실을 못하는 조기경보기를 상상할 수 있는가. 부러진 활을 가진 궁수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자주 ‘최소한’이라는 말을 쓴다. 21세기의 자동차라면 최소한 달리다가 제멋대로 서는 일은 없어야 하며, 수륙양용 장갑차라면 최소한 물이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최근 우리는 국새(國璽)에 대해 꽤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나라의 상징으로는 무엇보다 국기(國旗)가 있지만, 그와는 별도로 동서양이 각기 상징 이미지의 장치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서양에서는 문장(紋章)일 테고 우리 쪽에서는 인장(印章)일 것이다. 일반 시민들이 볼 기회는 별로 없다 해도 엄연한 나라의 도장이라는데 이러한 국가적 상징물의 제작과정에까지 거짓과 사기가 개입한 것이다. 또 한번 우리는 최소한의 조건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다. 도대체 다른 것도 아닌 국새를 가지고 장난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여기서 히말라야 14좌 완등의 헤로인 오은선을 들먹여야 하는 것이 안타깝다. 마지막 칸첸중가 등정과 관련된 설왕설래는 이미 잘 알려져 있으니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다. 역시 최소한의 기본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내외에서 미심쩍은 소리가 들려오고 무엇보다 당사자의 입에서 ‘믿어 달라’는 외침이 나오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이미 다시 등반하는 외에 다른 방법은 없어 보인다. 여느 민족 못지않게 세계 최초나 최고에 대해 열광하는 우리는 그녀를 믿어줄 태세를 충분히 갖추고 있지만, 세계의 시민들도 과연 그럴까? 단지 믿어 주는 것으로 되는 일이라면 여러 가지 증명의 방식들이 굳이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히말라야 등반의 비공식 인증자인 엘리자베스 홀리 여사의 말은 꽤 감동적이다. ‘오은선이 결코 거짓말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했다. 다만 틀렸을 수는 있다는 것이다. 옳은 말씀이다. 누가 과연 저 시장 뒷골목도 아닌 감히 히말라야, 그곳 지구의 지붕에 자신의 존재를 맡기는 순간에 허위를 농(弄)하겠는가. 홀리 여사는 또 한국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결국 우리는 네팔의 산기슭에서 수십 년째 살고 있는 한 서구 출신 여성에 의해 집단으로 시험에 들게 된 셈이다.

누구 편이건 아니건, 믿건 안 믿건 그런 따위는 전혀 중요치 않다. 사람들은 축구처럼 심판이 있는 스포츠 경기에서 은밀한 반칙을 해대는 데는 차라리 너그러워도, 골프처럼 심판이 없는 스포츠에서 일어나는 착오에 대해서는 결코 너그럽지 않다. 사람이란 자칫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속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기본’을 이야기하면서 오은선을 떠올리는 까닭은 바로 그런 연유다. 평범한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낼 그 극한의 경험이란 어느 면에서는 사뭇 거룩하기까지 한데, 그러한 경험이 속된 의혹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일 자체가 목불인견인 것이다.

나라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국방 전선에서부터 한 산악인의 양심선언까지 ‘최소한’이란 잣대를 자꾸 들이밀어야 하는 이 나라는 참 꼴이 말이 아니라는 말이다.

정재숙 문화스포츠 부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