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연인 같던 박용래·이문구, 아버지의 묘지값 할부로 갚던 김훈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공식적인 문학사(史)는 건조하다. 문제작과 그 배경에 대한 학구적 설명, 현란한 문학적 평가 등이 주를 이루는 문학사에서 정작 빠져 있는 것은 작가의 맨 얼굴이다. 그에 비하면 문학사의 이면을 전하는 문단사(史)는 사람 냄새가 폴폴 난다. 집필실보다 창작의 현장이라 할 만한 술자리·밥집·찻집 등지에서 문인들과 직접 몸으로 부대끼며 쓰인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정규웅씨가 1970년대 본지 문학담당 기자로 일하며 경험한 문단 이면을 정리한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밤늦도록 문학과 그에 얽힌 자신의 인생을 회고했다. [중앙포토]

한국 현대문학 100년사를 통틀어 문학이 가장 뜨겁게 창작되고 읽히던 1970년대 10년간을 고스란히 본지 문학담당 기자로 일하며 문학의 현장을 지켰던 문학평론가 정규웅(69)씨. 그가 인간적 체취 물씬한 문단사 책을 내놓았다. 1970년대 문단을 정리한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이가서)이 그것이다. 지난해 초부터 1년 반 동안 본지 일요일판인 중앙선데이 부속 ‘S 매거진’ 섹션에 연재했던 칼럼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원고를 묶었다.

연재 당시 칼럼은 눈 밝은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문학과지성사 상임 고문을 맡고 있는 평론가 김병익씨가 대표적이다. 그는 사석에서 “나도 미처 모르는 에피소드가 많아 빠뜨리지 않고 읽는다”며 정씨의 칼럼을 칭찬한 적이 있다. 매체는 다르지만 정씨와 비슷한 시기 문학담당 기자로 일했고, 문학과지성사를 이끌며 평생 문학에 헌신한 김씨의 칭찬이다 보니 단순한 인사치레로 들리지 않는다.

책은 모두 70꼭지의 글을 내용에 따라 ‘사람이 있는 풍경’‘책이 있는 풍경’‘이야기가 있는 풍경’‘시절이 있는 풍경’ 등 4부로 나눴다. ‘진짜 고은, 가짜 고은을 용서하다’ ‘황석영의 진실 같은 구라, 구라 같은 진실’ ‘이문열의 소설과 술의 역사’ 등 튀는 제목들이 먼저 눈길을 붙든다. 연인처럼 다정한 사이였던 시인 박용래와 소설가 이문구, 무협작가로 이름을 날렸던 아버지 김광주가 세상을 떠나자 돈이 궁해 묘지 대금을 할부로 갚았던 소설가 김훈의 사정 등 진귀한 사연들이 실제로 그득하다.

단순한 문학 뉴스 전달자가 아닌 전문가적 식견이 돋보이는 대목은 ‘겨울 여자, 성의 개방 시대를 열다’ 같은 꼭지다. 정씨는 조해일의 장편 『겨울 여자』가 중산층 여성 ‘이화’의 자유로운 성 편력이라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소재를 다뤘다고 해서 매도돼야 할 까닭은 없다며 옹호한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60만 명이 관람하는 대성공을 거둔 소설이 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는 70년대 상황을 예리하게 잡아냈다는 것이다. 문학적 엄숙주의와는 거리를 두는 균형감각이다.

27일 오후 서울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정씨의 책 출간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정작 기자보다 시인 이근배·이승철씨 등 문단 선후배가 더 많은 자리였다. 요즘 출판계에서는 차츰 자취를 감추는 오래된 축하 문화다. 정씨는 이 자리에서 “70년대 10년간 문학기자 생활이 내 평생의 행복이었고, 이후 나의 삶을 지탱해 준 힘이 됐다”고 회고했다. 또 “문학기자로서 출발은 문학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했다. 문학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모든 작품의 존재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물론 어떤 주의 주장이나 편견 없이 골고루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의 위상이 예전만큼 못한 요즘, 문학 저널리즘의 자세를 강조하는 대목에서다.

술 자리는 밤 늦도록 ‘차수 변경’을 하며 이어졌다. 간간히 고성이 오가기도 하고 노랫가락이 흐르기도 했다. 정씨가 숱하게 헤쳐 왔을 문단의 한 풍경이었다.

신준봉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