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장관-이근안 전 경감 20년전 악연 비로소 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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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58) 보건복지부 장관이 20년 전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고문 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66.전 경기도경 대공분실장)을 지난 7일 만나 용서의 뜻을 전했다.

김 장관은 재야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이씨는 민주인사를 탄압한 군사독재의 하수인으로 악연을 맺어왔으나 이번에 참회와 용서로 매듭을 푼 것이다. 김 장관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회(민청련) 의장이던 1985년 서울 남영동 소재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에서 이씨에게 10여 차례에 걸쳐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씨는 11년간 도피생활을 하다 99년 자수해 7년형을 선고받고 경기도 여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이날 면회는 이씨가 90도 각도로 김 장관에게 인사를 하면서 시작됐다. 둘만의 자리였다. 김 장관은 이씨의 손을 잡았고, 이씨는 "지난 20년간 뵙고 싶었다"며 가슴에 담아둔 말을 쏟아냈다.

"과거에 장관님을 고문한 사실을 인정합니다. 뼈저리게 뉘우치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사죄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씨의 고해성사가 이어졌다. 이씨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면서 김 장관에게 큰절을 하며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했다.

김 장관은 "마음으로는 이미 용서한 지 오래"라며 이씨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30여분의 면회를 끝낸 김 장관의 표정은 비교적 밝은 편이었다고 주변 인사들은 전했다.

김 장관의 부인 인재근씨는 "(두 사람의 만남이) 역사적인 일이다 보니 스스로 마음의 정리가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장관은 면회 전날 심적인 부담 때문인지 거의 잠을 못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99년 이씨가 자수했을 때 김 장관은 "용서라는 말을 하기가 힘들다…군사독재의 하수인으로서 국민을 모욕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그 이후 "이씨가 진실(고문 사실)을 고백한다면 용서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입장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러던 차에 지난해 7월께 이씨가 교도소 내 모임인 '참아버지회'에서 "잘못을 뉘우치고 있으며 김 장관을 위해 기도하겠다"며 용서를 구하면서 이번에 만남이 성사된 것이다.

김 장관의 한 측근은 "이씨의 자백과 반성을 접하고 그 역시 시대의 희생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끌어안기로 결심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는 85년 9월 대공분실에서 집시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김 장관을 조사하면서 무릎을 꿇게 하고 속옷만 입힌 채 담요를 말아 묶은 뒤 자백을 강요하며 물고문을 하는 등 20일 동안 11차례에 걸쳐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했다.

대법원은 94년 10월 이 같은 고문 사실을 인정해 국가가 김 장관에게 4500만원을 위자료로 지급하도록 판결한 바 있다. 김 장관은 고문을 당한 직후 석 달 반 동안 걸음도 못 걸을 정도로 몸이 상했다고 한다. 지금은 어느 정도 회복됐지만 비 오는 날 아직도 몸이 으스스하고 결리는 증세가 남아 있다.

신성식.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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