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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승병장’ 덜 알려 진‘구도승’ 사명대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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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사명대사(1544~1610)가 열반한 지 올해로 꼬박 400년이다. 경남 밀양의 표충사는 다음 달 9~10일 ‘사명성사(四溟聖師) 열반 400주기 추모대제’를 올린다. 조계종 총무원장이 봉행위원장을 맡은 종단 차원의 대대적인 행사다. 추모대제를 계기로 주로 승병장으로만 알려진 사명대사의 선사적 면모에 대한 재조명 작업도 본격화한다.

추모대제 기획위원회 이영기 기획총괄팀장은 14일 “사명대사에겐 정치적 카리스마가 있었다. 동시에 법을 위해 몸을 던지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철저한 구도승이었다. 그런데도 역사 속에서 사명당은 너무 설화 속에 묻혀 있었다”고 말했다. 표충사 측은 추모대제 행사 때 사찰 수장고에 있는 사명대사의 유품도 공개할 예정이다. 일본 NHK에선 사명대사 400주기를 기념해 이미 지난해에 표충사를 찾아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한 촬영을 마쳤다고 한다.

경남 밀양의 표충사는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했으며, 사명대사도 주석했다. 표충사 너머로 보이는 재약산의 정상 부근 사자평에서 사명대사는 승병을 훈련시켰다. [표충사 제공]

◆번뇌 없는 학문 찾던 유년=사명대사는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정3품 벼슬을 지냈다. 밀양에서 태어난 그는 13세 때 『맹자』를 배우며 이렇게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세속의 학문은 천하고 비루하다. 시끄러운 세상 인연에 얽매여 있다. 어찌 번뇌 없는 학문에 비하겠는가.” 그는 15세 때 모친을, 16세 때 부친을 여의고서 출가했다. 일각에선 정치적 사화로 몰락한 집안 내력이 어린 그에게 영향을 미쳤으리라 보기도 한다.

직지사로 출가한 그의 법명은 ‘유정(惟政)’이었다. 유정은 18세에 승과에 응시해 급제했다. 당시 승과는 선과(禪科)와 교과(敎科)로 나뉘어 있었다. 그는 선과에 응시했다. 대단히 젊은 나이의 급제였다. 그의 스승이었던 서산대사는 30세가 넘어서야 승과에 급제했다.

이후 유정은 한양의 봉은사(현 서울 강남 봉은사)에 10년 넘게 머물렀다. 32세 때는 봉은사 주지직에 추천됐다. 당시 봉은사는 선종의 총본찰이었다. 불교계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셈이다. 그러나 유정은 사양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터이다. 그리고 묘향산의 서산대사를 찾아갔다. 선(禪) 수행을 위해서였다.

◆떨어진 꽃, 얻은 깨달음=유정은 묘향산·지리산·팔공산·청량산·태백산·금강산 등 전국을 떠돌며 수행했다. 43세 되던 해 봄, 유정은 깨달음을 얻었다. 간밤의 소나기에 떨어진 꽃을 보고서였다. 그는 주위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일렀다. “어제 핀 꽃이 오늘은 빈 가지가 되었다. 인생의 덧없음도 이와 같다. 너희는 제각기 신령스러운 성품을 갖추었다. 어찌 그것을 구해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할 생각을 않는가? 여래는 내 안에 있다. 왜 밖에서 구하는가?” 그리고 선방에 들어가 열흘간 좌선한 채 움직임이 없었다고 한다. 서산대사를 만난 지 10년 만이었다.

이런 게송도 남겼다. “만법(萬法)은 본래 비어있는 꽃이다/어찌 헛되이 바다 속에서 모래를 셀 것인가/단지 철벽은산(鐵壁銀山)을 뚫고나갈 뿐/어찌할까 어찌할까 묻지 말라.”

그렇게 사명대사는 만법의 실상을 봤다. 눈 앞에 펼쳐진 이 우주가 비어있는 생명임을 말이다. 그러니 바다 속 모래를 세는 일은 어리석다. 바다도 비었고, 모래도 비었음을 볼 뿐이다. 은산철벽은 그렇게 뚫린다. 이 게송에는 사명대사의 선(禪)적 안목이 오롯이 녹아있다.

사명대사가 승병을 지휘할 때 썼던 칼인 지휘도. 선조가 하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표충사 소장.

◆나의 죽음도 자연의 조화=사명대사는 임진왜란 7년전쟁 중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명나라와 일본의 밀약(조선분할정책)을 탐지해 무효로 만들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목숨을 걸고 일본에 외교 특사로 갔다. “향후 250년간 어떠한 침략행위도 하지 않겠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약속과 함께 조선인 포로 3000여 명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했다.

표충사 총무를 맡고 있는 선혜 스님은 “당시 사명대사가 머물렀던 일본 사찰들은 지금도 박물관에 대사의 유품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명대사는 66세 때 해인사 홍제암에서 열반했다. 이런 말을 남겼다. “네 가지 요소(地水火風)로 된 이 몸은 이제 참(眞)으로 돌아가려 한다. 내 이제 입멸하여 큰 조화에 순응하려 한다.” 육신의 죽음도 이치 속에 떨어지는 꽃처럼 본 것이다.

사명대사의 열반 400주기 추모대제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승병에 대한 위령제, 사명당 가르침의 현대적 의미를 짚어보는 학술세미나, 사명대사 유물 특별전, 자비음악회, 사명대사 백일장 대회 등으로 꾸며진다. 055-352-4129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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