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학구파 양재호 '40대 반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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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어떻게 이세돌9단을 꺾었습니까. 치열한 격전이었는데 내용에 대한 평가도 아주 좋더군요.


"이기려는 마음을 버리고 재미있게 두려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승리에 대해 마음을 비운다는 게 잘 되는 겁니까.

"잘 안 되죠. 예선전에선 잘 되다가도 막상 중요한 바둑을 만나면 이기고 싶고 그래서 판을 망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상대도 이세돌9단이고 해서 마음껏 좋은 바둑이나 두자고 마음을 먹었지요."

-우승이 가까워졌는데 지금 심정은.

"하도 우승한 지 오래 돼서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또 우승을 욕심 내면 그순간 바둑이 흐트러지기 때문에 되도록 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해설자로 더 유명한 양재호9단(42.사진)이 현역 최강 이세돌9단을 꺾어 화제다. 1989년 동양증권배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지 16년 만에 생애 두번째 우승컵에 다가선 것이다.

무대는 9단들만의 대회인 맥심커피배 입신연승최강전 결승 첫판.(1일 한국기원 바둑TV 스튜디오)

3번기니까 아직 우승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세돌이 강점을 지닌 TV속기인 데다 이세돌의 전문분야인 격렬한 전투로 승리한 것이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양9단은 TV와 인터넷 해설뿐 아니라 도장을 열어 후진들도 가르치고 있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쁘고 주요 활동무대 역시 실전보다는 보급 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다.

양재호는 "후진들을 가르치면서 나도 배우고 있다"고 말한다.

오랜 기간 양재호는 '4인방'의 그늘 아래서 '랭킹5위'로 지냈다. 이세돌.최철한 같은 강력한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며 성적은 뚝 떨어졌다. 승부에의 집념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지만 한판 한판의 승부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 세월 속에서 어느덧 40대로 접어든 양재호가 배운 것은 승리에 몸 달지 말자는 것. 이기려고 애써봐야 더욱 몸만 굳어지는 승부의 철칙을 깨달은 것 뿐이다.

이번 대회에서 그는 승부를 잊고 마음껏 두어 루이나이웨이(芮乃偉).서봉수 등을 연파하고 결승까지 올랐고 이세돌까지 이기는 사건의 주인공이 됐다. 나머지 두판 중 한판을 이겨야 하니까 우승까지는 아직 요원하다. 그러나 나머지 두판에서도 우승의 욕심을 버리고 그냥 재미있게만 둔다면 진짜 우승컵을 따낼지 모른다. 마음 저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우승에의 욕망은 점점 더 거세질테지만 말이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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