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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포경수술 … 전쟁 중 시작된 한국 남성의 ‘통과의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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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6·25 전쟁 중 미군 이동외과병원의 수술 장면. 할례는 본래 유대인의 종교행위였으나 1930년대부터 의료 행위가 됐다. 오늘날 다수의 한국 사내아이들은 태어난 직후, 또는 사춘기에 접어들기 직전에 부모의 뜻에 따라 포경 수술을 받는다. 이토록 짧은 기간에, 완전히 새로운 통과의례가 만들어지고 정착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진 채 휴전회담이 시작된 1951년 여름, 미군 의무단 장교들에게 두 가지 고민거리가 생겼다. 하나는 개전 1년 만에 처음 휴식시간을 갖게 된 젊은 군인들 사이에 성병이 무서운 속도로 번진 것이었다. 군의관들을 각 부대에 파견해 예방교육을 시키는 한편 장교들에게 “성병 확산을 억제하라”는 ‘명령’을 하달하고 군 부대 주변을 왕래하는 젊은 여성들을 단속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전선 복귀를 앞두고 한 순간이나마 젊음을 소진시키려는 병사들을 아주 막을 길은 없었다.

다른 하나는 군의관들이 무료해진 것이었다. 전쟁 발발 이래 1년 가까이 총상·파편상·골절상·동상 환자들을 수술하느라 눈코 뜰 새 없던 군의관들이 몇 달째 별로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당시 미군 군의관의 80% 정도는 본토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밟다가 참전한 사람들이었다. 개전 후 부상자가 급증하자 군의관 징집도 늘었는데, 산부인과·비뇨기과·피부과 등 야전 의료에는 적합하지 않은 분야의 전문의도 징집을 피할 수 없었다. 환자가 폭주할 때를 대비해 이들에게 수술 경험을 쌓을 기회를 주어야 했다.

미군 지휘부가 공식적으로 지시하지는 않았으나, 일선 지휘관들은 단 1~2주 동안이라도 장병들의 성 접촉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 무렵부터 영등포의 121 후송병원을 비롯한 미군 병원의 군의관들이 다시 바빠졌다. 특히 다른 수술에서는 조수 노릇을 하던 비뇨기과 의사들이 수술장의 주역이 됐다.

성병은 미군과 국군을 가리지 않았고, 국군 군의관들도 한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선 의무대에 조금 여유가 생기면 국군 지휘부는 미군 병원에 군의관과 간호장교, 의무사병들을 파견해 교육을 받도록 했다. 국군 군의관들은 모든 것을 빨리 배웠고 금방 숙달됐다. 국군 장병들 사이에서는 이 수술이 위생 면에서나 그 밖의 면에서 좋은 점이 많아 미군들도 다 받는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졌다. 수술을 받고 나면 잠시나마 열외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장병들을 수술대 위로 끌어들인 요인이었다.

그로부터 한 세대 안에 절대다수 한국 남성들의 신체가 달라졌고 19세기에 사라진 관례(冠禮)를 대신하는 새로운 남성 통과의례가 정착했다. 오늘날 한국 남성의 포경수술 비율은 세계 제일인 바, 여기에는 의학적 효용뿐 아니라 전쟁을 겪으면서 ‘신분 관념’이 완전히 붕괴하고 그 대신 ‘균질화’의 욕구가 정면에 떠오른 사정도 작용했다. 남이 하면 나도 해야 하는 문화에서는 특수·특별·특권이 더 백안시되기 마련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