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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정체성 위기' 주장은 근거없는 억측에 불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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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17일자 기사에서 '표류하는 한국군' '군의 정체성 위기' 등의 제목으로 한국의 군체계가 엄청난 위기에 빠져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글을 실어 불필요한 논쟁의 불씨를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 이 기사를 작성한 미국 기자의 '정체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몰이해가 이 같은 억측을 자아냈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다. 현재 우리의 군은 광복 직후 창군 이래 가장 훈련이 잘 되어있고 일사불란한 명령체계 하에서 국방의 의무에 충실을 기하는 조직임이 검증되고 있다.

정체성이라는 용어의 진정한 뜻을 잘 이해 못하는 뉴스위크 기사내용에 우리가 흥분할 필요는 없지만 이 기사가 영향력있는 미국의 시사주간지라는 점에서 조심스럽게 글의 내용을 평가해야 하겠다.

군체계의 정체성을 측정하는 척도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포괄적 이해를 전제로 해야 된다. 군체계의 문화적 전통과 역사의 연속성, 군체계의 에너지.응집력.적응력의 정도, 군체계구성원의 욕구와 바람의 충족 정도, 군체계의 역할과 권한의 배분, 자원이용의 가능성, 군체계 내 각자 간의 경계선과 의사결정 과정의 원활성 등과 같은 관점에서 군 조직체의 정체성을 논해야 한다. 군인 개개인 간에 주고 받는 의견(예를 들어 주적.적 등등)의 특성과 범위의 다양성.원활성이 '표류' 또는 '위기'로 관찰되기보다는 오히려 높고 확고한 정체성의 확립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뉴스위크 기사내용이 기자 개인의 순수한 관찰이었다면 그 기자의 자질에 문제가 있으며, 만약 미국의 외교정책적 이해와 관련된 의도적 발상이었다면 이 또한 지극히 유감스럽다. 그 어느 관점에서도 기사내용의 타당성을 찾아볼 수 없다.

분단과 이로 인한 국민적 고통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당위'와 '현실'간의 큰 차이점에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정치.경제의 안정을 기해야 하는 정책은 고도의 정체성 확립이 전제되는 필수 불가결한 정책적 요인이라 할수 있다.

우리 군체계의 정체성은 고착적.폐쇄적 또는 전형적이 아니다. 우리 군의 정체성은 유연하고 개방적이며, 그리고 수용적이다. 인간 성장.발달 과정에서 생의 주기 정체성이 아동기.청소년기.장년기.노년기에 따라 다르듯 우리의 군체계도 한국전쟁 직후인 1950~60년대, 경제성장의 70~80년대, 그리고 경제.정치의 안정기에 들어선 90년대, 또한 21세기 시대의 정체성은 당연히 달라야 한다.

총구를 어디에 겨누어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한 어느 연대장의 분별력과 자질이 없는 발언에 우리 모두는 부끄럽다. 60년대 중반 월남전에서 나와 나의 많은 동료 장교는 그 전쟁의 무의미를 인지하였지만 청룡의 전투소대장으로서 의무와 역할에 충실하였고, 마지막 전투의 육박전에서 부상하고도 당당한 청룡의 군인으로서 나.우리의 군 정체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강화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법률.가족.교육, 종교제도와 같은 사회문화적 전통과 관습, 가치, 그리고 규범에 대한 충분한 이해없이 우리의 국방의무에 혼신을 다하고 있는 군 체계조직의 정체성을 정치.경제적인 외적 사회현실의 관점에서만, 그것도 과학적이고 객관적 자료의 제시없이 표류니 정체성의 위기니 하는 표현은 편견과 차별적으로 착색한 고압적 상징의 일환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 이후 지금까지 미국의 세계적 외교정책의 기본은 그 대상국의 외적 사회현실, 즉 정치와 경제 제도에만 초점을 두어왔지, 어느 국가든 그 사회의 체제를 뒷받침하는 사회의 내적 체계인 사회문화 제도의 전통, 역사적 연속성의 이해에는 게을렀다. 이 같은 균형을 상실한 미국의 외교정책이 수정되지 않는 한 타국의 조직 또는 체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있을 수 없다.

외국의 뉴스매체에 지나치게 민감하고 이에 순응하는 우리의 시민의식 또한 커다란 문제 요인이다. 어떤 현안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전제되는 조건은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며, 무엇보다도 타당한 자료에 근거한 다양한 지식체계의 획득이다. 이는 결국 우리 사회지도층 인사와 많은 시민이 합리적 지식기반으로 무장했음을 시사하는 바이며, 이러한 결과가 정체성과 같은 개념을 오도하는 외국 기사의 일방적 영향에서 탈피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정우식 서강대 교수·사회정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