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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저 출산율, 프리맘 배려만 잘해도 10% 올릴 수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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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호 10면

지난 8일 서울 여의도의 한 공원에서 30대 초반 임신부들이 프리 맘 배려운동 로고를 손으로 만들어 보이고 있다. 왼쪽 부터 박영미(31)김하나(30)오미선(30)김별아(30)씨. 신동연 기자

지난 8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리버타워 5층의 한 사무실에 네 명의 여성이 모였다. 고객서비스(CS) 강사인 오미선(30)·김하나(30)씨, 주부 박영미(31)·김별아(30)씨였다. 30대 초반 또래인 이들은 모두 임신 중이다. 임신 기간은 8주에서 6개월까지 다양했다. 네 명은 ‘프리 맘(Pre-Mom, 임신 14주 이내의 초기 임신부)’ 시절에 겪었거나 겪고 있는 고통과 좌절, 주변의 무관심을 얘기했다. 머지않아 아기 엄마가 될 그들은 초기 임신부 때 가족과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적지 않다는 데 공감했다. 또 그들이 받는 고통 중 상당부분은 사회적인 인식 부족에서 온다는 지적도 했다. 프리맘은 만삭의 임신부에 비해 겉보기엔 표가 나지 않지만 누구보다 보호해줘야 할 대상이다. 그들이 바라는 배려하는 문화에 대해 들어봤다.

30대 초반 임신부 네 명이 말하는 그들의 고통

KTX 승무원 출신인 오미선씨는 결혼 2년차다. 노사분규 와중에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고 현재 회사 측을 상대로 해고무효소송을 진행 중(1심에서 승소판결)이다. 지금은 ㈜예라고에서 고객서비스 강사로 일한다. 그는 경기도 소사구의 집에서 여의도로 출퇴근한다. 오씨는 출퇴근 시간에 받는 고통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지금 임신 21주차인데 초기에 입덧 현기증이 너무 심했다. 하지만 지하철을 타도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 노약자석이 분명히 있지만 앉기가 쉽지 않다. 사람이 많기도 하지만 배가 나오지 않아 임신했는지 다른 사람이 알아보기 어렵다. 앉아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버릇없다는 듯이 쳐다본다. 지금 내 여동생도 임신을 한 상태인데 며칠 전 둘이 코엑스에서 열린 베이비 페어에 갔다오다가 둘이니깐 용기를 내서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았다. 이걸 본 어떤 할머니한테 아주 혼이 났다. 임신했다고 했지만 들은 척도 안 하시더라.”

오씨는 대한민국에서 임신부들은 사회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갖가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고 말을 이어갔다. 임신을 하면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임신부는 마땅히 사회적 배려를 받아야 함에도 대중교통을 타고 직장에 가는 것도 힘들고 직장 회식에서 빠지는 것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 이유에 대해 임신 초기에 임신부임을 밝히기 어려운 사회 분위기를 꼽았다. 회식 때마다 직장 상사나 남자 동료가 담배를 피워 대고 술을 왜 안 마시느냐고 권하는 데도 임신했다는 얘길 꺼내기가 어렵더라고 했다. 외모가 단정해야 하는 고객서비스 강사인데 임신하고서 할 수 있겠느냐는 눈초리도 견디기 힘들었다고 덧붙였다.

정부, 10일 2차 저출산 대책 발표
박영미씨는 임신하려고 8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기까지 한 경험담을 털어놨다. 지금 임신 8주차다. 서울시내 유명 호텔의 웨이트리스였던 박씨는 2008년 결혼했다. 당시 호텔 로비 라운지에서 오후 근무조로 일했다. 일은 오후 5시에 시작해 새벽 2시쯤 끝났다. 임신은 하고 싶어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결혼 후 1년6개월가량 오후 근무조로 일했기 때문에 회사 측에 오전 근무로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 회사 측은 임신도 안 했는데 무슨 소리냐, 당신만 특별대우를 해 줄 수 없다며 싫으면 그만두라는 투로 일관했단다.

“임신을 하고 싶은데 오후 근무라 어려웠다. 몸도 힘들고 남편도 싫어해 이를 오전 근무로 바꿔주거나 다른 부서로 옮겨달라고 했더니 몇 달 동안 결정을 미뤘다. 기다리다 못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사표를 내라고 했다. 그런 회사에 다녔다는 것이 후회스러울 정도였다. 기업들이 말로는 출산 장려, 육아 휴직 보장 운운하지만 정작 실천도, 배려도 하지 않는다는 걸 절감했다.”

박씨는 집 밖으로 나왔을 때 임신부가 쉴 공간이 없다고 지적했다. 구청이나 백화점에 가면 수유실은 있으나 임신부가 쉴 만한 공간은 없는데 정부가 그런 걸 배려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박씨는 2주일 전 시댁식구들과의 저녁 자리에서 혈흔이 비쳐 깜짝 놀랐다. 저녁상을 차리느라 무리한 탓이었다.

“임신부는 임신 초기가 제일 위험하다고 한다. 갑자기 어지럽기도 하고 잘못해서 쓰러지면 유산 가능성이 크다. 이런 때 배려가 필요한데 만삭이 된 임신부는 배려하면서도 정작 더 위험하다는 초기 임신부에게 무관심한 게 안타깝지만 현실인 것 같다. 솔직히 다음 주로 다가온 추석이 무섭다.”

김하나씨는 대학 졸업 후 보석감정사로 일해 왔다. 결혼 5년차로 2007년 첫 아이에 이어 현재 둘째 아이를 임신한 지 6개월이 됐다. 그는 최근 보석감정 회사를 그만뒀다. 작은 사이즈의 다이아몬드를 하루 평균 5000개를 핀셋으로 세는 게 그의 기본 업무 중 하나였다. 임신하면서 집중이 안 돼 일을 할 수 없어서였다. 회사 측이 업무 부서를 바꿔주면 좋은데 전 직원 300명 중 남자가 10명에 불과한 직장 분위기가 그런 걸 기대할 상황이 아니었다.

“내 작업속도가 느려지면 다음 사람이 진행을 못 하게 된다. 이상한 건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데도 임신한 동료에 대한 배려심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미혼여성이 많아서 임신보다는 결혼에 관심이 더 있는 회사 분위기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결혼하면 당연히 회사를 그만두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강했다. 남자보다 여자가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가장 좋은 태교는 마음이 편한 것인데 임신은 네가 했으니 네 몸은 알아서 챙기라는 식으로 대할 때 가장 서러웠다”고 말했다. 이어 “출산 직전에 주는 육아휴직은 사실 임신부가 가장 힘든 시기인 임신 초기에 줘야 맞다”고 제안했다. 착상이 제대로 안 되거나 집안일과 회사일 때문에 생기는 스트레스로 유산이 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실제로 위험한 일도 겪었다. 출산 후 모유 수유를 하면서 잠을 설쳤고, 피로가 쌓여 쓰러지는 바람에 119에 실려간 적이 있다.

그 역시 초기엔 임신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6개월이 지나서야 공개했다. 혹시 직장에서 피해를 볼까봐 걱정돼서였다.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도 자기 회사 신입사원을 뽑을 때 여자가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는 걸 보고 사회적 인식 부족을 실감했다고 한다.

김별아씨는 임신 11주째다. 보통 임신 14주 이내에는 의사의 권유 때문에라도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 김씨는 “요즘 착상이 되는 시기라서 조심해야 한다는 얘길 들었지만 프리맘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기 위해 기꺼이 나왔다”고 했다. 그는 “은행에 다니다가 임신 사실을 알고 직장을 그만뒀다”며 “지난 2월에 임신테스트를 했을 때 임신으로 나왔는데 그때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었다”고 했다.

서울시 의사회 등 주도 민간 캠페인 시작
박씨와 김별아씨는 길거리 흡연자와 마주쳤을 때 매우 고통스럽다고 했다. 거리를 걷다 보면 담배를 물고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은데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속이 메슥거리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는 것이었다. 지정된 장소에서만 담배를 피워야 하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하나씨는 버스를 탈 때 신용카드를 대면 “임산부입니다”라는 안내 멘트가 나오는 시스템이 도입됐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국민은행이 임신부 진단서를 제출하면 40만원이 든 바우처카드를 만들어주는 데 이 제도의 운용도 개선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냈다. 한번에 4만원까지 산부인과 진료 때밖에 사용 못 해서 꼭 필요한 다른 곳에 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씨는 “결국은 우리 임신부 스스로도 마음가짐이 제대로 안 돼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선진국에서처럼 우리도 임신 초기부터 당당하게 임신사실을 밝히고 태어날 아기를 위해 엄마로서 할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사회적 분위기와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초기 임신부를 배려하기 위한 민간 차원의 사회문화 운동이 시작됐다. 지난 6일 서울 롯데호텔에선 프리맘배려운동본부가 주관한 프리맘 데이(9월 6일) 선포식이 열렸다. 웅크린 태아의 생김새를 닮은 숫자 ‘9’와 배가 불러온 임신부의 형상을 닮은 ‘6’에 의미를 부여했다. 이날 행사에선 프리맘임을 쉽게 식별할 수 있게 하는 배지가 배포됐다. 앞으로 운동본부는 임신부 지정좌석 사용의 활성화, 일하는 여성과 저소득층 임신부를 위한 무료 진료, 미혼모와 다문화가족을 위한 봉사활동, 공공장소 및 직장 내 임신부들을 위한 휴식 의자 설치 권장 등의 활동을 펼쳐 나가기로 했다. 프리맘 배려를 위한 관련 법과 제도의 개선운동도 병행한다.

프리맘배려운동에는 서울특별시의사회도 적극 동참한다. 이 단체 나현(57) 회장은 “프리맘배려운동의 핵심은 초기 임신부를 배려해 국가적 문제인 저출산을 극복해 나가자는 것”이라며 “임신부 보호문화의 정착이라는 이 캠페인의 취지를 의료계에 널리 알리는 것이 제 임무”라고 말했다. 그는 “초기 임신부를 배려하면 출산율이 높아지고 저출산 문제가 풀릴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매년 20%의 자연유산율 중 70%가 초기 임신부에게서 발생한다고 한다. 이것만 막아도 출산율을 10% 이상 높일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 출산율은 1.15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 정부는 10일 보육료 지원 확대 등 저출산 대책을 발표했다. 가톨릭대 산부인과 김찬주(45·여) 교수는 “외국에선 임신했다고 하면 그때부터 공주대접을 받는데 우리 사회에선 말도 못하고 배가 안 부르다는 이유로 푸대접받기 일쑤”라며 “임신 직후부터 열 달을 어떻게 지내야 할지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은 고쳐져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임신부에 대한 배려는 산모가 아니라 주변사람들과 그 사회가 의무로써 해 줘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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