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구형 람보르기니와 페라리의 행렬 해발 2000m 절벽길, 시간 맞춰 달려라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산맥 동쪽에 위치한 돌로미티(Dolomiti) 국립공원은 2009년 6월 14만1903헥타르가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됐을 정도로 절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해발 3000m가 넘는 산이 18개나 되며 그중 가장 높은 마르몰라다산은 무려 3343m로 1년 내내 만년설로 덮여 있다.

밀라노를 출발해 4시간여 만에 돌로미티 국립공원 안에 있는 미주리나 호수에 도착할 무렵 멋진 스포츠카 한 대가 ‘쌩’하고 우리를 추월했다. 연한 베이지색의 빈티지 카브리올레(Cabriolet·오픈카)다. 차 옆에는 큰 번호가 찍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제63회 돌로미티 골든 컵(Coppa d’Oro delle Dolomiti·9월 2~5일) 자동차 경주에 참가한 차량이었다.

1947년 시작된 이 대회는 여러 가지로 일반적인 자동차 경기와 다르다. 우선 빨리 가는 차가 우승하는 게 아니라 정해진 시간에 가장 근접해 통과하는 차가 우승한다. 이 경기를 주관하는 벨루노 자동차 클럽(ACI Belluno)의 파올로 스트라가(Paolo Strag<00E0>) 회장은 “예전에는 가장 빨리 돌아오는 차가 이기는 경기였지만 1957년 사고 이후 도로에서 속도를 내는 경기는 금지됐고 빈티지 차들을 위한 레귤러 경기로 바뀌었다”고 들려주었다.

출발 전 모든 경기 참가자들은 책자를 받게 된다. 이 책자에는 자세한 지도가 들어있는데, 마을 이름이 적힌 구간마다 통과해야 하는 시간이 초 단위까지 표시돼 있다. 참가자들은 제한된 속도를 넘어선 달릴 수 없다. 스피드 경기가 아니라 시간의 정확성을 요구하는 경기인 셈이다.

게다가 20년이 넘은 빈티지 차량이어야 출전 자격이 주어진다. 스트라가 회장은 “일단 20년 이상 돼야 하며 차의 모델과 상태 등에 따라 등록 여부가 확정된다”고 설명했다. 21년 된 메르세데스 벤츠를 갖고 있다는 그는 “빈티지 카로 보면 내 차는 아직 아기”라며 “출전 차량을 보면 포르셰, 페라리, 알파 로메오, 마세라티, 란차 등이 가장 많고 재규어나 트라이엄프 등도 있다”고 덧붙였다.

또 포뮬러원(F1) 경기처럼 한꺼번에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한 대씩 간격을 두고 출발한다. 차가 출발할 때 시간을 체크하고 각 마을을 지날 때마다 시간이 다시 체크된다. 모나코에서 F1이 열릴 때는 모든 길을 차단하고 경주차들만 달리게 하지만 돌로미티 골든 컵에 참가한 경주 차량들은 일반 차들과 같은 길을 달린다.

그래서 두 빈티지 카 사이에 어색하게 끼게 되는 21세기의 일반 차들은 자신들이 눈치 없이 끼어든 것이 미안한 듯 줄행랑을 치기도 하지만, 가능한 한 오랫동안 두 대의 멋진 차 사이에 끼어 달리면서 차창 밖으로 팔을 길게 뻗어 앞뒤에 있는 빈티지 카들의 사진을 찍기도 한다.

1956년 제7회 겨울올림픽이 개최됐던 코르티나에 도착했다. 이 경기는 코르티나에서 출발해 코르티나로 돌아온다. 코르티나의 두오모 성당 바로 앞에는 경주 출발점을 알리는 큰 문이 설치되어 있었고 주변엔 앞에서의 차와 같은 스티커를 붙인 빈티지 카 100여 대가 주차돼 있었다. 이 중에는 페라리 375MM, 란차 아스투라(Lancia Astura), 치시탈리아 202(Cisitalia 202) 등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모델들부터 란차 아프릴리아(Lancia Aprilia), 아우렐리아 B20과 B24(Aurelia B20 & B24), 메르세데스 벤츠 300SL(Mercedes Benz 300SL), 알파 로메오 줄리에타 스프린트(Alfa Romeo Giulietta Sprint), 그리고 포르셰 356(Porsche 356) 등도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보며 해발 2000m의 구불구불한 절벽 길을 달리는 이 경주의 매력에 빠지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는 것일까. 올해엔 유럽 각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처음으로 참여했다. 포르셰를 모는 여성 드라이버도 있었다. 2000년부터 회장을 맡고 있다는 스트라가 회장은 “대회가 점점 국제적이 돼가고 있다”며 “80%가 이탈리아 참가자들이지만 3~4년 전부터는 홍콩과 아시아에서도 참가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들은 첫날 144.03㎞의 코스를, 둘째 날에는 216.55㎞의 코스를 달렸다. 올해의 우승은 1938년형 피아트 508C를 가지고 참가한 시칠리아의 마리오 파사난테와 프란체스코 메시나 커플에게 돌아갔다. 특별히 올해는 우승자에게 이탈리아 나폴리타노 대통령으로부터 메달이 수여됐다.

다음 날 경기 코스를 역으로 달려보았다. 처음에 주최 측의 컨트롤 카들이 지나갔다. 이후 좁은 계곡 길에서, 나무가 울창한 숲 길 사이에서, 멀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가파른 산길에서 계속 해서 빈티지 카들을 만났다. 베레모에 진한 선글라스를 낀 젊은 일본인 레이서도 있었고 구부러진 길 옆에 차를 세우고 셔터를 눌러대는 관광객들 앞에서 차 속도를 줄여 승리의 V자를 손가락으로 그리는 멋쟁이 신사도 있었다. 스무 대가 넘는 각양각색의 람보르기니 행렬과 10대가량의 포르셰가 함께 달리는 것도 장관이었다.

8월 한 달간의 긴 여름 휴가도 이들에게는 짧은 것일까. 돌로미티의 크고 작은 마을에서는 9월 초인 지금까지도 돌로미티 골든 컵을 비롯해 민속 축제가 계속되고 있다. 짧은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발길을 돌리는 여행자의 안타까운 심정을 달래주는 것은 바위산 뒤로 숨는 붉은 해뿐이었다.

글 김성희 중앙SUNDAY 매거진 유럽통신원



이탈리아 밀라노를 무대로 활약 중인 보석디자이너. 유럽을 돌며 각종 공연과 전시
를 보는 게 취미이자 특기. 『더 주얼』(2009) 등을 썼다.
sunghee@stella- b.com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