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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쯔양을 추모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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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자오쯔양의 말년은 중국 공산당과 사법당국을 부끄럽게 한다. 그는 16년간 가택 연금을 당해 중국 사회로부터 철저히 격리된 채 살았다. 중국 경제 개혁을 위해 헌신한 지도자에 대한 부당한 박해였다.

그의 개척 정신과 노력은 오늘날 중국 경제의 기초가 됐다. 1970년대 후반 중국 농민들은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잃은 지 오래였다. 인민공사 창설과 집단농장화에 따른 것이다. 자오는 처음으로 농민들에게 자율경작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민공사 철폐도 시도했다.

중국 기업은 국영화와 중앙 통제로 인해 정부 산하기관으로 바뀌었다. 자오는 최초로 중국 기업의 자율권을 확대, 정부와 산업의 건전한 관계를 회복하자고 주장했다. 기업.농민의 자율권을 확대한 것은 훗날 활짝 꽃핀 중국 경제 개혁으로 이어진 첫 단추였다.

그는 중국 인민들이 숨 막히는 마오쩌둥(毛澤東) 사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도움을 줬다. 10년간의 경제 개혁으로 인민들이 실감할 수 있는 변화를 점진적으로 가져왔다.

그는 일당 독재를 견제할 수 있는 정치개혁을 제안한 유일한 중국 공산당 지도자였다. 도전받지 않는 독점 정치 권력의 실책은 전국적 위기로 번지게 마련이다. 10년간의 문화혁명이 그 예다. 자오는 궁극적이면서 장기적인 안정을 위해 민주주의의 체계화.합법화를 위한 개혁을 제안했다. 건강한 시장 경제를 지지하고, 민주정치가 확립되기를 원했다. 마오쩌둥식 전체주의와 헤어져야 한다는 그의 제안은 중국 공산당 내 최고 기관인 13차 당대회에서 승인됐다.

그는 20개월 동안 총서기를 지내면서 공산당 정치국이 법원을 간섭하고, 문학.예술을 통제하려는 것을 막았다.

불행히도 그의 정치 개혁은 권력에서 물러나면서 중도 폐지됐다. 그 결과 시민 권리와 민주주의의 원칙은 무차별적으로 거부당했다. 오늘날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로 불리는 체제가 등장했다. 이는 견제되지 않는 권력이 상업적 이해와 맞물려 있는 상황을 완곡하게 표현한 용어다.

그는 89년 천안문 사태의 폭력 진압에 반대한 뒤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그에 앞서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가 자유주의 입장을 견지하다가 87년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 축출된 후 89년 4월 세상을 떴다. 베이징(北京)에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평화 시위를 시작했다. 곧 전국으로 확산됐다. 이것이 천안문 사태의 시작이었다. 자오는 후야오방에 대한 학생들의 추모 감정과 민주주의 열망이 정치국원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강조했다. 또 학생 시위를 원만히 해결하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원칙을 존중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의 뜻에 따라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학생들과의 대화를 요청했다. 그러나 희망적인 조짐은 덩샤오핑이 폭력 진압 의사를 밝히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결국 다섯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이 표대결을 벌였다. 리펑(李鵬).야오이린(姚依林)은 군대 파견 방안을 모색했다. 차오스(喬石)와 후치리(胡啓立)는 처음에는 자오쯔양 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지를 철회하고, 덩샤오핑에게 최종 결정을 위임했다.

의견 차이가 크자 덩샤오핑은 더 이상의 논의 없이 군인 50만명을 동원, 비무장 학생.시민들을 진압했다. 천안문 사태는 중국과 20세기의 비극이었다. 이는 아직도 인민들의 마음과 정신에 고통으로 남아있다.

중국 지도자들은 자오의 불법 가택 연금과 역사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려는 조직적인 노력에 대해 책임이 있다. 과거의 진실을 숨기려는 시도는 자신들의 허약함과 뻔뻔스러움을 드러낼 뿐이다. 그래도 한 가지는 바꿀 수 없다. 권리와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중국 인민들의 노력이 계속되는 한 자오는 함께 남아 있을 것이다.

정리=박현영 기자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계약 전재)

바오통(鮑) 자오쯔양 전 총서기 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