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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세종의 개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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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세종은 성군으로 불린다. 그래서 세종이 '어질게' 한 말씀하시면 만사가 물 흐르듯 해결됐으리란 상상을 한다. 그런 세종이 개혁에 힘겨워 했다면 뜻밖이겠지만 사실이다. 세제 개혁에 장장 17년 걸렸다.

세종 즉위 당시 조세는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을 따랐다. 수확의 10분의1을 내되, 조사관이 풍흉을 감안해 액수를 조정했다. 그런데 조사관의 농간으로 농민 허리는 휘고, 국고수입은 줄었다. 세종은 개혁을 원했다. 평년 평균 수확의 일정량을 내는 공법(貢法)을 대안으로 내놨다. 안정된 정치 기반을 물려받은 세종이 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은 뜻을 세우고 실행하기까지 32년 재위기간의 반이 넘도록 고민하고 고민했다.

즉위 9년, 1427년 논의가 시작돼 다음해 황희 정승이 공법 시행시 생길 문제를 알아보는 데까지 갔다. 그러나 반응이 모호하자 세종은 일단 물러섰다. 그러곤 1429년 11월 다시 호조에 "신민들의 생각을 알아보라"고 명했다. 4개월 뒤 있은 보고에 만족하지 못한 세종은 전국 여론조사를 명했다. 당시로선 대단한 발상이었다.

한 달 동안 관리.백성 등 17만여명의 의견을 들었다. 찬성 9만8657명, 반대 7만4149명. 찬성이 많았지만 왕은 더 생각했다. 수확이 많은 남쪽엔 찬성이, 적은 북쪽엔 반대가 많은 것이 걸렸다. 경상도에선 찬성이 3만6262명으로 반대(377명)를 압도했다. 반대로 평안도에서는 반대(2만8474명)가 찬성(1326명)을 압도했다. 왕은 실행을 무기연기했다.

논의는 1436년 재개돼 개혁담당 기구도 마련됐다. 그러나 조정 의견이 엇갈려 또 유보됐다. 공법은 재위 26년인 1444년에 확정돼 이후 조선 세제의 기틀이 됐다. 지난주 정부 주최로 열린 '선조에게서 배우는 혁신 리더십' 세미나에서 발표된 '세종의 세제개혁 과정에 나타난 혁신 리더십'의 내용이다. 발표문의 결론은 "세종의 정치는 '찬반 의견이 크게 갈릴 때 적절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개혁이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개혁의 이름'으로 우리 사회 일각은 신속.과감한 결정을 다그친다. 그러나 세종은 개혁의 다른 면을 보여준다. 왕조 시대였음에도 설득과 통합을 중시한 왕의 혁신 리더십은 '개혁은 때론 인내와 함께 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짧은 호흡의 개혁은 실패할 수도 있다는 '역(逆)의 교훈'과 함께.

정치부 안성규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