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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전략 스톱, 돈 더 풀어 세계경제 엔진 다시 달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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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호 10면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가운데)과 시라카와 마사하키 일본은행(BOJ) 총재(오른쪽), 장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왼쪽)는 온갖 위기 증상에 시달리고 있는 선진국 경제를 치료해야 할 주치의들이다. 사진은 세 사람이 지난해 8월 미국 와이오밍주 잭슨홀 미팅에 참석해 이야기하는 모습. [블룸버그 뉴스]

미국 월가 사람들은 변덕스러운 시장을 ‘초피마켓(Choppy Market)’이라고 부른다. 주가의 급변동을 바람의 방향이 순식간에 바뀌는 현상에 빗댄 말이다. 요즘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주요 시장이 초피마켓 증상을 보이고 있다. 작은 소식 하나에 주가, 시장금리, 통화가치가 출렁인다. 시장 참여자들이 투자 방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경기 전망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미·일·EU 중앙은행 총재들 “더블딥을 잡아라” 잭슨홀 컨센서스

요즘 시장 참여자들의 눈과 귀가 벤 버냉키(57)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시라카와 마사하키(白川方明·61) 일본은행(BOJ) 총재, 장클로드 트리셰(68)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의 입에 집중되고 있다. 그들은 선진 경제권을 사실상 책임지고 있다.

마침 세 사람이 지난달 26~28일 미 와이오밍주 잭슨홀에서 회동했다. 잭슨홀 미팅이다. 옐로스톤 국립공원 남쪽에 자리 잡은 작은 휴양지에서 이뤄진 만남이니 분위기는 국제통화기금(IMF)이나 국제결제은행(BIS), 주요 20개국(G20) 회의와는 사뭇 다르다. IMF 총회 등은 공식적이고 사무적이다. 반면 잭슨홀 미팅은 주요국 중앙은행 총재들이 휴식을 겸하며 느긋하게 장기적이고 거대한 경제담론을 주고받는 자리다. 올해 주제는 ‘향후 10년의 거시경제 과제’였다.

지난달 26~28일 美 휴양지서 회동
그러나 글로벌 시장은 한가한 대화 대신 다른 것을 원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진경제의 더블딥(침체에서 잠시 회복했다가 다시 추락하는 현상)을 막는 일이다. 그만큼 경제 상황이 다급하다는 방증이다.

우선 금융위기 진앙인 미 주택시장이 심상치 않다. 지난 7월 잠정주택 판매가 예상과는 달리 5% 남짓 늘어나기는 했다. 매매 계약이 늘어났다는 얘기다. 하지만 실제 주택시장 거래 동향을 보여주는 신규와 기존 주택 매매는 급감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 미 컬럼비아대 교수는 “미 주택시장이 2차 하락을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월가 전문가들은 “집값이 5~10% 정도 더 추락할 것”으로 보고 있다. 미 집값은 2006년 2분기 최고치에서 30% 정도 떨어진 상태다.

미국과 일본 경제 성장률도 눈에 띄게 낮아지고 있다. 미국 2분기 성장률(연율)은 1.6%에 그쳤다. 지난해 4분기 5.0%에서 가파르게 낮아지는 모습이다. 일본은 올 2분기에 0.4% 성장했다. 미국에서는 주택시장 둔화가, 일본에서는 디플레이션과 엔화 강세가 성장 발목을 잡았다.

유로사용권(유로존)의 겉모습은 좋아 보인다. 올 2분기 성장률이 애초 0.6%에서 1%로 상향 조정됐다. 트리셰는 올 성장률 전망치를 1%(6월 예상치)에서 1.6%로 높였다. 하지만 유로존 시중은행들이 스스로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 사태 여파 탓이다. 은행들이 자산건전성 조사(스트레스 테스트)까지 받으며 시장의 불신을 털어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닥터 둠’ 누리엘 루비니는 최근 경제전문 방송인 CNBC와 인터뷰에서 “올 3분기 미 성장률이 1% 이하로 떨어져 0%에 가까워질 수 있다”며 “더블딥 확률을 숫자로 말한다면 40% 이상”이라고 말했다. 또 “미국이 더블딥에 빠지면 일본과 유럽뿐 아니라 중국도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월가 “미국 집값 5~10% 더 하락”
버냉키·시라카와·트리셰는 잭슨홀 미팅에서 한목소리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더블딥에) 대응하겠다”고 선언했다. 영국 가디언지는 이를 ‘잭슨홀 컨센서스’라고 불렀다. 미국 초대 재무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이 말한 ‘돈의 홍수’를 일으키겠다는 것이다. 시라카와 총재가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섰다. 그는 지난달 30일 추가 양적 완화를 단행했다. 연 0.1% 이자만을 받고 시중에 공급하기로 한 자금 규모를 20조 엔에서 30조 엔으로 늘렸다.

트리셰는 2일 금융통화정책회의에서 기준금리를 1%에서 동결했다. 유로존 시중은행들에 대한 자금지원을 “내년 말까지 유지하겠다”고 선언했다. 돈이 다급한 시중은행에 3개월 만기 자금을 기준금리인 연 1%만을 받고 무제한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ECB는 이미 천문학적인 자금을 시중은행에 퍼부었다. 시중은행들에 빌려준 돈은 올 6월 말 현재 7000억 유로(1050조원) 이상이다.

세 사람의 잭슨홀 컨센서스는 사실상 출구전략 중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적어도 더블딥 우려가 남아 있는 한 출구전략 카드는 쓰지 않겠다는 얘기다. 대신 양적 완화 전략으로 유턴을 의미한다.

각자의 속사정은 좀 다르다. 미 중앙은행 내부의 매파와 비둘기파의 의견 대립이 심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공개된 8월 10일 공개시장정책위원회(FOMC) 의사록에 따르면 인플레이션을 우려하는 쪽이 돈 풀기에 반발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추가 경기부양 가능성도 크지 않다. 미 의회가 재정 악화를 이유로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세안을 놓고도 의회 내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공화당은 고소득층과 기업을 포함한 포괄적 감세안을 지지하고 있다. 오바마와 민주당은 연소득 25만 달러(2억9000만원) 이하 중산층에만 감세 혜택을 주자는 쪽이다. 이런 논란은 11월 중간선거 때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반면 버냉키의 권한은 대폭 강화됐다. 금융개혁법(도드-프랭크법)이 제정돼 버냉키는 은행·지방은행·저축은행의 지주회사 6500여 곳을 감독할 수 있게 됐다. 게다가 FRB의 자산이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1조 달러(1180조원)로 불어났다. 버냉키는 기준 금리 카드는 쓰지도 않은 채 FRB 자산 구조만 살짝 바꾸는 것만으로도 시중 자금 사정을 크게 바꿔놓을 수 있다.

2007년까지 6년 동안 FRB 금융통화정책 연구원을 지낸 빈센트 라인하르트는 이달 2일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버냉키는 과거 어떤 FRB 의장보다 폭넓은 통화정책과 금융감독 권한을 쥐게 됐다”고 말했다.

시라카와의 추가적인 양적 완화는 시장의 믿음을 사지 못했다. 돈을 풀었지만 엔화 가치가 눈에 띄게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일본 신슈대학 마키오 아카베(경제학) 교수는 2일 블룸버그와 인터뷰에서 “(시라카와의 처방은) 시장에 감동을 주지 못한 대책이었다”고 꼬집었다. 너무 진부했다는 얘기다. 그 결과 ‘디플레이션→채권 실질 가치 상승→외국인 일본 국채 매집→엔화 가치 상승→수입 물가 하락→디플레 악화→실물경제 추락’이라는 악순환이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다.

트리셰는 금융혈맥이 막혀 애를 먹고 있다. 유로존 은행들이 시장에서 자금 조달을 뜻대로 하지 못해 중앙은행-실물경제 사이에서 중간 고리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와중에 그리스·스페인 등의 재정 불안이 다시 불거지면 금융위기로 번질 수도 있다. 유로존 실물경제도 양극화돼 있다. 독일 경제가 활력을 보이는 반면 그리스·스페인 경제는 여전히 침체다.

세계 경제 저성장 국면에 들어설 듯
노던트러스트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폴 캐스리얼은 최근 보고서에서 “선진국 경제가 V자 형태로 위기와 침체에서 탈출할 것이라는 희망은 이미 깨졌다”고 말했다. 캐스리얼은 경제 예측을 가장 정확하게 경제분석가에게 주는 로런스클라인상을 2006년 받았다.

그는 “중국이 수출시장으로 구실을 해주고 FRB가 적절하게 대응하면 미 경제가 올 4분기에 0% 아래로 깊이 곤두박질할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는다”며 “제로 라인(0% 선) 주변에서 맴돌다가 더디게 회복할 듯하다”고 예상했다.

전문가들은 “1937년과 80년 더블딥이 모두 FRB의 정책 선택 때문에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1937년 침체는 FRB가 거품과 공황의 악순환을 두려워해 과도하게 통화량을 줄이는 바람에 일어났다. 80년의 경우는 뿌리 깊은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제거하기 위해 FRB가 기준금리를 올렸기 때문이다.

캐스리얼은 “버냉키·시라카와·트리셰가 잭슨홀 미팅에서 보여준 컨센서스에 비춰 1937년이나 80년 같은 정책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래서 선진국 경제 흐름이 U자형을 띨 것이라는 전망이 관심을 끌고 있다. 저성장 국면이 상당 기간 이어지는 시나리오다. 세계적 금융역사가인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는 3일 이탈리아 경제 콘퍼런스에서 “더블딥 전망은 너무나 성급한 예상”이라며 “경제 성장이 상당이 위축돼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또 “경제 성장이 위축돼 있는 동안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에서 인플레이션 압력은 높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시아 등 신흥국가 경제가 과열될 위험은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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