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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Focus] 국립대 첫 여성 부총장 박명진 서울대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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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학 첫 여성 부총장’으로 임명된 박명진(63) 서울대 부총장이 23일 취임 한 달을 맞았다. 여교수 자체가 귀하던 1980년 신문학과(현 언론정보학과) 교수로 발탁된 지 30년 만 이다. 박 부총장은 평생 ‘첫 여성’ 타이틀을 달고 다녔다. 한국언론학회장(제30대 )과 초대 방송통신심의위원장(2008년 5월~2009년 8월)을 맡는 등 언론학계 안팎의 영향력도 크다. 그가 가르친 ‘영화론’은 영화광을 매혹시키는 명강의로 꼽혔다. ‘기호학·담론분석 방법론’은 문화 연구의 초석을 깔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초대 MC로 2년 반 동안 진행했던 KBS 프로그램 ‘TV, 책을 말하다(아래 사진)’를 통해서도 이름을 날렸다. 인터뷰는 11일과 19일, 서울대 부총장실에서 두 차례 이뤄졌다.

글=이진주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첫 여성 부총장으로서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됐는데.

“아직도 ‘여성 첫’이란 표현이 있다니 그 점이 더 놀랍다(웃음). 대학사회, 특히 국립대에는 보수적인 분위기가 많이 남아 있어서 부담이 됐을 텐데, 총장께서 굉장히 용감한 일을 감행하신 셈이다.”

●(방통심의위원장에서 물러난 뒤) 꼭 1년 만의 귀환이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강의하며 그동안 미뤄뒀던 책을 쓰려고 준비했다. 영화를 보고 차 맛을 음미하며 ‘느리게 살기’의 충만함을 깨달았다.”

●이 자리까지 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일차적으론 우리 세대 여성이 사회에 진출한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근래 들어 여교수의 비율이 늘어났지만 보직을 통해 행정과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수는 여전히 제한돼 있다.”

●여성으로서 학교나 학계의 무엇을 바꿀 수 있나.

“남성들이 모르기 때문에 실현할 수 없었던 성차별에 대한 민감한 사항들을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 성평등은 넓게는 인권의 문제다. 서울대 전체 재학생의 40%가 여학생이고, 5%가 외국인이다. 장애인 학생도 70여 명이다. 인권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고 더불어 살 수 있는 제도적·문화적 방법을 모색하려고 한다. 총장을 도와 인권과 사회적 정의 실현에 관심을 갖는 ‘따뜻한 서울대생’을 키우는 데 집중하겠다.”

●현재의 선발 방식으론 힘들 것 같은데.

“서울대가 다양한 정책을 준비 중이다. 미국 예일대는 트레일러에서 생활하는 빈곤 가정 학생을 선발한다. SAT 점수는 좀 모자라지만, 그런 환경에서 그 정도 능력을 보여준 아이라면 예일대에선 폭발적인 성취를 이룰 것이라 믿는 거다. 우리도 ‘공부하는 기계’로 훈련된 학생만이 아니라 잠재력을 가진 인재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

박 부총장은 공학자인 남편(이교일 전 서울대 교수·기계항공공학과)과의 사이에 두 남매를 뒀다. 서른네 살에 낳은 큰딸(29)은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예술경영 석사학위를 받았다. 내심으론 배우가 됐으면 했던 막내아들(27)은 차세대 유망 분야인 신·재생에너지(수소전지)를 개발하고 있다.

●가족들로선 ‘이제 좀 쉬시나 보다’ 했더니 다시 바빠진 셈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가족 구성원 사이에 ‘가장 도움이 필요한 구성원에게 힘을 모아주자’는 지혜가 생겼다. 아이들이 고3일 땐 거기에 집중했다. 남편이 보직을 맡았을 때는 집안일이 다 내 차지였다. 지금은 가족들이 날 밀어준다.”

●이상적인 가정 같다.

“결코 아니다. 젊은 시절엔 아내 역할을 못해서 남편과 갈등이 있었다. 아이들도 일만 하는 엄마에게 불만이 많았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는 모습은 많이 보여줬겠다.

“전혀. 남편은 실험실에서 살았고, 나는 사실 영화·드라마 보는 게 일이었다. 그나마 너무 바빠서 얼굴도 잘 보여주지 못했다. 다 자라서야 가족여행을 한 번 갔는데 내 딸, 내 아들이 그렇게 유쾌한 아이들인지도 몰랐다. 자식을 새로 얻은 기분이 들더라.”

●언제 가정의 평화가 찾아왔나.

“결국은 시간이 해결해 줬다. 각자에겐 저마다의 인생이 있고, 서로 얼마나 다른 사람들인지 깨닫는 시간이 필요했다. 남편이 ‘뽕짝’과 바둑을 좋아한다면 나는 클래식과 드라마를 좋아한다. 아이들은 트로트는 질색을 하고 팝이나 록 음악을 듣는다. 처음엔 서로의 취향을 무시하고 비난했다. 지금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얼마 전 남편의 생일 선물로 온 가족이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을 불러줬을 정도니까.”

●“밤 깊은 마포종점~” 말인가.

“그렇다. 남편 몰래 2절까지 연습했다. 남편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웃음)”

방통심의위원장은 그가 예순한 살의 나이에 시도한 첫 공직 외도였다.

●위원장 임용과 사퇴 배경을 궁금해 하는 이가 많다.

“방송 PD도 해봤고 유학 시절 잠깐 영화 연출도 공부했다. 가르치는 일이 가장 행복했다. 학교에 있는 동안 밖에 나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하나 그 일은 방송의 공정성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평생 옳다고 믿고 가르쳐 온 원칙이 훼손되는 걸 바로세우는 일도 소임이라 여겼다.”

●성과와 한계를 짚어보자면.

사진=KBS 제공

“지상파 방송의 공정성, 특히 정치적 중립성을 재확립하기 위해 애썼다. 고려대 김민환 교수를 좌장으로 동수의 진보·보수 학자들이 몇 달 동안 논쟁한 끝에 정치적인 시비를 최소화할 수 있는 공정성의 기준과 구체화 방안을 담은 보고서를 냈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다른 구성원 사이에서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계에 부닥쳤을 때 학교로 돌아왔고 실패한 게 맞다. 방송의 공정성과 인터넷에서의 책임 확립이라는 원칙에 골몰했으나 세우는 방법엔 소홀했다.”

‘평생의 원칙’을 둘러싼 시련은 2004년 6월, 그가 이끌던 언론학회가 이른바 ‘탄핵방송 보고서’를 펴낼 때부터 시작됐다. “아무리 느슨한 기준을 적용해도 공정했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보고서의 결론은 뭇입에 오르내렸다.

●진보 진영에선 “보수정권의 ‘언론 장악’에 악용된다”고 주장하는데.

“당리당략에 따라 공정성에 대한 기준이 달라지는 건 위험하다. 방송의 공정성은 1980~90년대 진보 진영이 앞장 서서 확립한 원칙이다. 진보 정권이 들어서는 데 기여했다. 민주화 과정에서 학계와 언론, 시민사회가 어렵게 세운 원칙을, 그 최대 수혜자가 폐기 해야 할 낡은 개념이라고 폄훼하는 격이다. 방송의 공정성 원칙을 주장하는 것이 보수라 한다면 할 말 없다.”

●젊은 시절 프랑스에서 ‘비판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한 진보적 학자로 알려졌는데.

“좌파적 비판의식은 일종의 ‘시대정신’이었다. 엄혹한 시대에 그런 문제의식이 없다면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이념의 변질과 공산권의 붕괴를 지켜봤다. 오늘날 세상은 훨씬 더 복잡하다. 보수·진보라는 단순 기계적인 분류를 이제는 지양해야 한다. 비판의식은 문제 있는 곳에 가해져야 하는 균형감각을 필요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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