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천안함을 광화문 광장에 공개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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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영화 ‘공공의 적 1-1’의 한 장면이다. 영화 속 시신은 많은 말을 한다. 왜, 어떻게, 어떤 자세로 죽었는지,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 무기는 뭔지. 시신이 말해주지 않은 건 하나, 누가 살인자인지뿐이다. 그마저도 완전히 침묵하진 않는다. 희미하지만 살인자의 윤곽도 알려준다. 칼로 사람을 해쳐본 자, 능숙히 칼을 다룰 줄 아는 자다. 조폭 조직이 ‘고교생 똘마니’를 위장 자수시켰지만 경찰은 ‘프로의 솜씨’라며 안 믿는 이유다.

천안함을 두고 돌아오는 길, 내내 영화 속 장면이 떠나지 않았다. 중앙일보의 일요신문 중앙SUNDAY 기자들은 지난주 경기도 평택의 해군 제2함대를 찾았다. 언론사론 처음이다. 부둣가 야적장, 천안함이 거기 죽어 있었다. 허리가 반으로 잘려 내장을 드러낸 채. 군데군데 시뻘건 녹이 눈에 띈다. 녹슨 자리에 손을 댔다. 꿈틀, 천안함이 처참했던 그날의 악몽을 기억해내는 듯했다. 착각이었으리라. 마침 비가 내렸다. 녹물이 비와 섞여 흘렀다. 문제의 절단 지점. 국방부 관계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 굵은 철판이 안으로 휘어 말린 게 거대한 버블의 증거.” “전선에 불에 탄 흔적이 하나도 없으니 내부 폭발은 아닌 것.” “형광등이 멀쩡한 건 물속이라 충격의 범위가 작았기 때문.”

칼잡이 용만처럼 그의 설명은 명쾌했다. 영화 속 시신처럼 천안함의 주검도 모든 의문을 한순간에 풀어주는 듯했다. 그러나 현실은 영화와 달랐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믿지 않는 이들은 안 믿습니다. 어뢰가 아니라 기뢰라고 우깁니다. 버블의 위력이 그렇게 클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배 밑의 긁힘이나 휜 스크루를 이유로 계속 좌초설을 얘기합니다. 갖가지 작은 트집을 잡는 겁니다. ‘두 동강 난 천안함’이란 가장 큰 증거는 애써 외면하면서 말입니다. 한 술 더 떠 유품도 못 거두게 합니다. ‘정부가 증거를 인멸하려 한다’는 거지요.”

국방부 조사 결과를 부정하는 과학자·전문가들 주장의 종착지는 “북한의 짓이란 명백한 증거는 없다”다. 반면 국방부 조사는 “명백히 북한 짓이다”다. 서로 반대편을 보고 달리는 열차 같다. 둘 사이의 접점 찾기는 애초에 글렀다. 어떤 과학적 증거를 들이댄들 귀를 막기 일쑤니.

그러는 사이 천안함은 애물단지가 됐다. 피격 150일이 지나도록 진실 규명은커녕 논란만 커졌다. 피해자끼리 멱살잡이에 바빠 살인자 찾기는 뒷전이다. 시민들은 왼쪽 오른쪽, 친북 반북, 친정권 반정권으로 갈려 믿고 싶은 대로 믿을 뿐이다. 사회는 깊고 크게 갈렸다. 큰 시위만 없다 뿐이지 2년 전 광우병 사태 때와 꼭 닮았다. 그러나 천안함은 광우병과 다르다. 눈에 보이는 결정적 증거, 시신이 있다.

그 시신, 허리 끊긴 천안함을 모두에게 공개하자. 몸의 상처 하나하나엔 표시를 해놓자. 이 상처가 왜, 어떻게 생긴 것인지, 충격은 얼마나 컸는지, 무기는 뭔지. 그 앞에 좌초설이며 내부 폭발설 따위는 설 자리가 없다. 깊은 과학 지식도 필요 없다. 딱 보면 안다. 나머지 쟁점은 두고두고 밝히면 된다.

장소는 광화문 광장이 좋겠다. 광화문 광장은 길이 557m, 폭 34m다. 길이 88m, 폭 10m의 천안함이 들어가고 남는다. 늘 눈앞에 보이니 세월 흘렀다고 잊을 리도 없다. 관광객도 찾기 쉽다. 한국을 찾는 세계인에게 참상의 현장을 직접 보여줄 수 있다. 연간 150만의 중국 관광객용 견학 프로그램을 따로 만드는 것도 생각해볼 만하다. 귀국 후 이들이 중국 내 여론을 움직이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