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月暈(월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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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용래(1925~1980), 「月暈(월훈)」 전문

첩첩 山中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읍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뚝, 그 너머 江기슭에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坑(갱) 속 같은 마을. 꼴깍, 노루 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木瓜(모과)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우를 깎기도 하고 고구마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溫氣(온기)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老人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月暈(월훈).



이제 어느 고요한 귀가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들을 수 있을까. 우두커니 서 있는 줄로만 알았던 짚단에서 이렇게 살아있는 소리를 꺼낼 수 있을까. 어느 가슴이 그 설레이는 짚오라기의 소리에서 새들의 온기를 느낄 수 있을까. 숨을 죽이고 그 온기에 전율할 수 있을까. 한겨울 <기인 밤>의 추위를 그 소리의 온기로 따뜻하게 할 수 있을까.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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